그리하여, 내내 정오正午의 궤를 그릴 이들에게
달한 님(시라카베 사유네 생일 축하글)
글/소설

누가 말하길, 북부의 어느 영지에는 누구보다 지혜로운 신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 신은 두려움의 존 재인 동시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 지니고 있는 자로서, 자신의 상냥함과 자비로움으로 영지를 평안 하게 다스려 뭇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모든 영지민들이 그들의 신을 칭송하고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신 역시 자신이 다스리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북부의 살아있는 신, 수백 년을 살아온 겨 울의 수호자, 혹은 설산에 피어난 첫 번째 서리꽃. 신을 칭하는 단어는 많았지만 어떠한 호칭도 그 신을 완벽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에게도 이름은 있었으니.

 

신에게 사랑받는 축복을 얻은 이 영지의 사람들은, 그들의 신을 ‘시라카베 님’이라고 불렀다.

 

***

 

신의 영지라고 이름 붙여진 이곳은, 봄이 무르익기 전인 이때에 자신들의 신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며 항상 작은 축제를 열었다. 북부의 겨울이 혹독한 만큼 봄은 언제나 달가운 계절이기 마련이라. 길던 겨 울이 끝나고 새봄을 맞이하는 기쁨이 더해져 이 축제는 영지민들이 1년 중 제일 좋아하는 행사였다.

 

축제의 열기로 영지가 온통 소란스럽게 북적인다. 에도의 규모 정도로 커다란 축제는 아니었으나 영지 에서는 꽤나 중요한 행사였기에 여기저기 준비로 한창이었다. 낮에는 시라카베 님의 이야기를 담은 구 전동화를 인형극으로 보여주고, 밤에는 즐비한 노점상들이 따뜻한 음식 냄새를 풍기며 사람들을 이끌었 다. 하지만 사람들로 제일 붐비는 곳은 아담한 사당 앞에 자리한 소원함이었다. 한 계절의 시작을 알리 며 탄생을 축하하는 공물을 바치고, 그에 걸맞은 소원을 비는 곳. 시라카베 님의 사당은 평소에 잘 공개 되지 않는 공간이기에 유달리 사람들이 모이는 편이었다.

 

시라카베 님에게 바치는 공물은 갯수도 종류도 따지지 않았으나 딱 두 가지 규칙이 있었다. 크기가 크 지 않을 것, 그리고 하얀 것을 바칠 것. 첫번째 규칙은 사치와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직접 시라카베 님이 정한 것이었지만 두 번째는 수백년 간 전통을 이어가다 보니 자연스레 정해진 것이었다. 시라카베 님의 색은 하얀색이기 때문에 그분께 바치는 공물이라면 어울리는 색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입장. 이러한 규칙 때문에 축제가 다가오는 시기가 되면 영지민들은 하얀색 물건을 찾으러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축제 시기의 가판대에 온통 하얀 물건이 오르는 것도 당연한 흐름이었다. 원래 찾는 사람이 많으 면 물건이 많아지는 것이 이치 아니던가.

 

“녹지 않는 호수에서 자라는 눈맞이꽃입니다! 아주 예쁘게 활짝 피었어요!”

 

“자, 없는 게 없습니다! 말끔한 손거울에서 새하얀 바늘까지! 한 번 구경하고 가세요~!”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듯 가판대마다 호객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물건을 파는 사람도, 사는 사 람도 모두 웃는 표정이었다. 어딜 보나 축제를 즐기기 위해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그러나 수많 은 인파 속에서 주변의 흐름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어깨 뒤로 흘러내리는 긴 머리칼을 가진 사내. 카츠라 코타로. 이 장소와 가장 낯선 사람이 소란 스러운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의 시선이 무심하게 가판대 위의 물건을 훑는다. 온통 하얀색으로 반짝이는 것밖에 없다. 이곳이 바로 사유네가 있는 장소라는 것을 온몸으로 나타내는 듯이.

 

카츠라는 저도 모르게 그 색에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가 움찔 손을 거뒀다. 어색하게 굳은 그의 뒤로 영 지민들과 구경객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듯 웃으며 거리를 지나갔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모두 그녀의 손길이 닿은 덕택이겠지. 그러나 사람들의 미소로 가득한 이 거리의 한복판에 서서, 카츠라는 도저히 웃 을 수가 없었다. 하얀색의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미소 짓는 사유네의 얼굴이 카츠라의 눈앞에 그려졌다 가 금세 사라져버린다. 그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원래는 여기에 오려던 계획이 아니었는데.’

 

그녀가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고 난 후에도, 그리고 지독했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카츠라의 마음은 여전 히 사유네에게 향해 있었다. 그렇기에 아직 스스로 때가 아니라고 여겼지만 이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물론 핑계야 있었다. 며칠 전, 조금 있으면 사유네의 생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다른 이유는 없이 선물만 조용히 전해주고 온다면,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고 순수하게 친우의 마음이 라며 만나보고만 온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불쑥 머릿속에 떠오르고 말아서.

 

하지만 막상 이곳에 도착해 영지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카츠라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여태 한 조각 도 버리지 못하고 품에 간직하고 있는 이 마음을, 순전히 생일과 친우의 마음이라며 덮으려고 했었나. 자신을 한없이 과대평가한 생각이었다. 그녀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이렇게나 심장이 뛰어오르 는데.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가라앉히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카츠라의 손이 가슴 위를 덮었다. 그러다 문 득 손 아래로 느껴지는 감각에, 그제야 자신이 가져온 사유네의 선물이 품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이것을 전해주려고 온 건데. 자신이 없다. 그녀를 보고 싶다는 마음과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마음 이 공존했다.

 

‘나는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건가….’

 

카츠라의 시선이 도망치듯 가판대를 벗어나 먼 풍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구름에 걸린 산꼭대기마저도 아직 봄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라는 듯 하얗게 쌓인 눈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부 흰색으로 뒤덮인 공간은, 어딜 돌아보나 그녀의 색으로 가득 차 있어서. 수년이 흘러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숨을 내쉴 때마다 사유네의 얼굴이 머릿속에 점점 가득하기만 했다. 무언가를 떨쳐내려 는 것처럼 고개를 젓던 카츠라가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웃는 사람들로만 가득한 거리에서, 오직 카츠라만이 홀로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도 못한 채 정처 없이 사람들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길게 늘어진 줄의 한복판 에 서 있었다. 두런두런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이곳이 소원함으로 향하는 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시라카베 님에게 공물을 바치고 소원을 비는 곳이 여기인가. 순간 문득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 었다. 내내 생각해보았으나 역시 직접 선물을 전해주는 것은 무리였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이런 모습으 로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마음도 상황도 제대로 준비되고 나면 그때 다시 마음을 전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선물을 이대로 전하지 않고 떠날 수는 없으니. 소원함의 공물로 선물을 두고 가면 되지 않을까. 물론 이렇게 되면 사유네는 이 공물이 누가 전해준 것인지 알 수 없을 터였지만, 상관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그녀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마음이 전해지기만 한다면.

 

줄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그제야 이미 수많은 소원을 담고 있는 소원함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카츠라의 차례가 되었을 때, 카츠라는 안내에 따라 제 손에 쥐어진 소원 종이 를 들고 멍하게 굳어버렸다. 그저 공물만 바치고 나오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소원까지 적어야 할 줄 은 몰랐다. 진정 원하는 소원은 너무도 커다래서 적을 수 없었고, 나머지는 적기에 지나치게 사소한 것 들뿐이었다. 카츠라가 어색하게 붓을 집어들고 머리를 굴려보고 있을 때였다.

 

“시라카베 님, 이번에는 꼭 그이와 결혼하게 해주세요.”

 

“시라카베 님, 시라카베 님. 저희 아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주시고….”

 

“시라카베 님!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인형을 갖고 싶어요!”

 

시라카베 님, 시라카베 님. 그제야 카츠라는 주변에 온통 ‘시라카베 님’을 향하여 소원을 비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부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며 빌고 있었다. 아 마 그녀의 귀에도 저 수많은 소원들이 들리고 있겠지. 카츠라는 자신의 영지에 관해 이야기하며 푸른 눈을 휘어 웃던 사유네의 얼굴을 떠올렸다. 누구보다 영지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상냥하고 다 정한 그녀라면 분명히 사람들의 소원을 듣고 최대한 이뤄주려고 할 터였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으니 까.

 

“시라카베 님, 제 소원을 꼭 들어주세요….”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신에게 소원을 빈다. 그렇다면 신은, 누구에게 소원을 빌어야 하나. 문득 카츠라의 머릿속에 나지막한 물음이 흘러들어왔다. 이 사람들에겐 소원을 빌 ‘시라카베 님’이 있다 지만. 그 시라카베 님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과연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 걸까. 

 

‘… 나는, 남녀노소 누구나 밤길을 맘 놓고 걸을 수 있는 영지를 만들고 싶어.’

 

오랫동안 사랑한, 그리고 사랑하고 있는 목소리가 말한다.

 

‘분명 아름다울 것 같지 않니?’

 

한참을 굳어있던 카츠라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자신의 소원을 적고, 종이를 접어서 소원함에 넣는 다. 마지막으로 그가 가져온 선물마저 공물로 바치고 나면 끝이었다. 의식을 끝내고도 약간은 멍하게 서 있던 카츠라를, 줄에 밀려 다가오는 사람들이 금세 밖으로 밀어내었다. 카츠라는 순순히 걸음을 옮기며 사유네가 있을 성을 올려다보았다. 온통 하얗고 푸르다. 마치 사유네처럼. 눈에 담기는 그녀의 흔적을 더듬듯 마지막으로 창가에 시선을 둔 카츠라는 곧 아무 말 없이 뒤를 돌아 자리를 떠났다.

 

아직은 추운 봄이었다.

 

***

 

길고 짧았던 축제가 끝났다. 하지만 시라카베 님의 업무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소원함의 종이를 열고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도 시라카베 님에게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무릇 올바른 영주라면 영지민들 의 소원과 일상도 유심히 관찰할 줄 알아야 했기에. 종이의 산이 소복하게 쌓였을 때쯤, 사유네의 손이 한 종이쪽지에 문득 멈췄다.

 

“… 어머?”

 

반듯하게 적혀있는 익숙한 글씨. 잊을 수 없는 글씨체였다. 코타로 군이 왔었구나. 오랜만의 반가운 편 지를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유네의 표정이 느릿하게 풀어졌다. 왔으면 얼굴이라도 보고 갔으면 좋 았을 것을. 하지만, 사유네는 카츠라가 어째서 자신을 만나지 않고 사라졌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그 아이의 마음은 아직도 올곧게 자신을 향하고 있을 테니까. 아무리 ‘시라카베 님’이라도 그 소원 만큼은 쉽게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카츠라도 그런 소원이 쉽게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츠라가 소원 함에 적어낸 종이쪽지엔 그런 내용이 전혀 적혀있지 않은 것을 보면. 그를 닮은 글씨는 대신 다른 문장을 담고 있었다.

 

시라카베 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생일 축하하네.

 

사유네의 올라간 입꼬리 너머로 작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 코타로 군도 참. 이런 소원을 비는 경우는 처음인데.”

 

그렇지만, 이런 소원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마치 언젠가 그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던 것처럼, 반 듯하게 접힌 자국만을 남긴 종이쪽지를 한 번 만지작거렸다. 분명 온기가 남아있을 리 없는데도 따듯하 게만 느껴진다면 제 착각일까. 사유네는 함께 공물로 들어온 카츠라의 선물을 손에 들어 올렸다. 하얗게 피어난 얼음꽃 모양이 장식되어있는 흰 비녀. 해보지 않아도 제게 잘 어울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선물을 골랐을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작게 웃음이 새어나온다. 예상치 못한 소 원에, 예상치 못한 선물까지.

 

“고마워, 코타로 군.”

 

들릴 리 없는 대답을 전하고, 사유네가 웃었다. 언젠가 그를 만나면 이 말을 다시 전해줘야지. 어쩐지 답을 듣고 붉어진 그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느릿하게 다시 미소가 떠오른다. 그와 다시 마주 하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분명 달빛 아래 이 선 물은 더 아름답게 빛날 테니.

 

반쯤 열린 창가로 옅은 달빛이 방 안을 비춘다. 구름에 가린 상현달이 아직은 이른 봄바람에 스치고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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