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내내 정오正午의 궤를 그릴 이들에게
세아 님(당신을 향한 나의 오만(로판AU)
글/소설

꽤 재산을 가진 미혼의 남성은 틀림없이 아내를 원하리라는 것은 널리 인정받는 진리이다. 하 지만 시라카베 사유네는 그 진리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꽤 재산을 지닌 미혼의 여성이 틀림 없이 잘생긴 남편을 원하리라는 것은 모든 여자들이 인정하는 진리일 것이라고. 그런 점에서 카츠라 코타로와 시라카베 사유네는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존재였다. 카츠라 코타로는 아내를 필요로 했고, 시라카베 사유네는 남편을 필요로 했다.

 

"그러니까 남작은 나에게 청혼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나?"

 

"네, 맞습니다. 레이디 시라카베에게 정식으로 결혼을 요청합니다."

 

카츠라는 사유네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사유네는 부채를 쥐고 그것을 천천히 접었다 펼치며 생각에 잠겼다. 현재 시라카베 공작가의 모든 권한은 사유네에게 있었다. 자신의 결혼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두 사람에게 펼쳐질 미래도 전부 사유네의 말 한 마디로 인해 결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남작과 결혼함으로써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지? 나는 이미 이 시라카베 공작 가문의 주인이 다. 카츠라 가문이 명예가 드높은 가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게 내가 그대와 결혼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지."

 

"네, 맞습니다. 시라카베 가문의 주인이신 레이디께서 한낱 남작에 지나지 않는 저와 결혼해야 할 의무는 없지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 마음이 바뀌실 겁니다."

 

카츠라 코타로는 논리적으로 황실과 시라카베 가문 사이에 미묘한 관계, 사유네의 전 남편의 죽음. 카츠라는 그것에 대해 자신이 무언가 알고 있다는 어투로 말하였다. 사유네는 그의 설 명을 가만히 들었다. 사유네는 자신의 남편을 연인으로서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삶의 동반자 로서 존중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의 충격은 이루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 었다.

 

시라카베 사유네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진리를 모른 채 하며 살 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삶의 동반자로서 죽은 이에게 바치는 작은 의무. 그것은 바로 진실을 알리는 것. 사유네는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아, 그대가 황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인지했다. 그대는 시라카베를 필요로 하고, 나는 그대의 정보를 필요로 하니 결혼으로 맺어지면 양쪽 다 이득을 보겠지. 하지만 하나만 더 묻겠어. 황실과 연이 있으면서도 중립을 유지하는 가문은 시라카베 가문만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런데 왜 하필 우리 가문이지?"

 

"미망인이……."

 

"미망인이?" "취향입니다. 남편을 잃은 여성 분께 마음이 갑니다."

 

"……."

 

카츠라 코타로는 붉어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며 대답했다. 사유네는 그의 붉게 달아오른 얼 굴을 빤히 바라보다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위에 있던 하인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유네가 이렇게 큰 소리로 웃은 것은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

 

그 뒤에 두 사람의 계약 결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작가에서는 몇 개월 뒤 열릴 결혼식 을 준비하고, 결혼식에 어떤 사람들을 초대할지 선별하고, 각종 파티에 참석하여 결혼 소식을 미리 알리는 등……. 상당히 정신 없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시라카베 사유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니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 혼자 와도 괜찮다고 했는데. 바쁜 일이 있는 것이 아니었나?"

 

"남편의 의무에 충실해야지요. 결혼식에서 입을 드레스를 선별하러 가신다면 따라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날은 사유네가 의상실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사유네의 몸에 맞추어 제국 내에 일류 디자이 너들이 다양한 결혼식 드레스를 준비했다. 디자이너들을 직접 불러 공작가에서도 옷을 입어볼 수 있었지만, 사유네는 오랜만에 외출도 할 겸 의상실에 직접 방문하는 것을 택했다.

 

아침에 웨딩드레스를 보러 의상실에 가겠다고 카츠라에게 말했을 때, 카츠라는 다소 놀란 표 정을 지으며 그날 계획했던 일정을 전부 취소했다. 사유네는 그런 그의 모습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전 남편과는 비즈니스적인 만남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웨딩드레스를 입든 남편 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카츠라 코타로는 어떠한가. 그는 자신의 일정까지 뒤로 미루고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 을 택했다.

 

사유네는 그것을 구태여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무척 고맙다고 느꼈다. 옆에서 아무리 시녀 들이 잘 어울린다고, 예쁘다고 칭찬을 해 주어도 결혼할 상대에게 듣는 말 만큼 가치가 있지 는 않았다. 어쨌든 사유네는 카츠라에게 고마운 마음을 지닌 상태로 그와 동행했다.

 

카츠라는 의상실로 향하는 마차 내에서 조용히 책을 읽었다. 마차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어지 럽지도 않나. 사유네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유네는 그가 책 읽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가 마차의 작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길거리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가족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면.

 

사유네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한편, 카츠라 코타로는 창 밖에 시선이 팔린 사유 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책을 읽는 척을 하였지만, 사실 한 글자도 머 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사유네에게 들키지 않고 그를 쳐다보기 위해 책을 읽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사유네도, 카츠라도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지만 카츠라는 심지어 책을 거 꾸로 들고 있었다.

 

카츠라의 얼굴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사유네와 처음 만났을 때를 곱씹고 있었다. 겨울 에 내리는 눈처럼 살랑이는 머릿결, 바다를 얼려 박은 듯한 투명한 푸른 눈동자. 카츠라는 사 유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서 시선을 떼는 것이 어려웠다. 침착한 남작의 역할을 하는 것은 그의 일생에서 손을 꼽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미망인이 취향입니다.'

 

그런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했던가. 사유네는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카츠라는 진심 을 담아 하는 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미망인이 좋다는 말은 단순한 핑 계에 지나지 않았고, 그는 '사유네'라는 사람 자체에게 스며들었다. 그를 처음 만난 뒤부터 그 의 머릿속에는 온종일 사유네가 떠다녔다. 혹자는 그의 이런 마음을 분명히 사랑이라고 정의 할 터이지만, 카츠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 그것은 오만이다.

 

카츠라는 사유네와 자신의 격차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사람이 고, 이것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임시 동맹에 지나지 않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다. 카츠라는 이 감정에 숭배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유네는 자신이 무릎 꿇고 받들어야 할 신과 같은 존재. 인간이 신에게 연애적 감정을 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 도착했네. 이만 내려야겠어."

 

어느 새 마차는 의상실 앞에 도착했다. 카츠라는 먼저 마차에서 내려 안에 있는 사유네에게 손을 뻗었다. 사유네는 그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려왔다. 의상실의 직원이 사유 네의 도착을 다른 직원들에게 알리며 문을 열었다. 딸랑, 하고 기분 좋은 종소리와 함께 사유 네와 카츠라는 의상실 안으로 들어갔다.

 

카츠라는 의상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사유네는 의상실의 디자이너들의 손에 이끌려 옷을 갈아입는 곳으로 들어갔다. 드레스를 갈아입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순히 드레 스만 입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추어 헤어스타일도 바꾸어야 하고, 장신구도 골라야 했기 때문 이다. 카츠라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공작가의 미망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푸른 색의 소설에는 그런 제목이 쓰여 있었다. 집에서 아무 책이나 주워 왔더니 제목이 엉망 이다. 왜 하필 골라도 이런 책을 골라왔지? 카츠라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요즘에는 이 런 소설이 유행인 것인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읽을 만한 것을 그 책밖에 없었으 므로 카츠라는 책장을 넘겼다. 예상했던 것보다 스토리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레이디 시라카베께서 나오십니다."

 

한창 책에 집중하던 와중에, 의상실의 직원이 사유네의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카츠라는 책 을 내려놓았다. 룸을 가리던 와인색 커튼이 걷히고 사유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츠라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사유네의 모습은 가히 인간의 아름다움이라고 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유네는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올렸다. 진주와 푸른 다이아몬드 로 만든 장신구를 머리에 꽂았다. 하얀 피부에는 홍조가 돌도록 옅은 화장을 더 하였다.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나부끼는 속눈썹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크리스탈이 달린 새하얀 웨딩드레스는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하여 형형색색으로 분광되었다. 미의 여신이 현현한다고 하더라도 이리 아름다울 수는 없으리라.

 

"잘 어울리나? 어떻게 생각하지?"

 

사유네는 카츠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카츠라는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찬란한 모습에 홀려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사유네는 카츠라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만 있자 그에게 다가가 볼을 콕 찔렀다. 그제야 카츠라는 놀란 얼굴로 사유네를 올려다 보았 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길래 내 목소리도 못 듣는 것인지……. 그래도 나는 그대의 신부가 아닌 가."

 

카츠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잠시 헛기침을 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져 한 손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얼굴을 가렸다. 사유네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부디 이 소리가 사유네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카츠라는 마른 침을 삼킨 뒤, 겨우 더듬더듬 칭찬을 늘어놓았다.

 

"아름답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마주했던 그 어떠한 여성보다도, 미의 여신보다도 아름다우십니 다. 감히 인간의 언어로 당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제가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대는 농담이 지나쳐. 그렇게 칭찬해 주어도 나오는 것은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칭찬은 고맙게 듣도록 하지."

 

사유네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카츠라는 그의 웃음소리가 세이렌의 노랫소리보다 고울 것 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사유네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한 바퀴를 돌기도 하고, 드레스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그러고는 디자이너와 짧은 담소를 나누다가 다른 옷으로 갈아 입기 위해 다시 룸으로 들어갔다.

 

카츠라 코타로는 멀어지는 사유네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당신은 내 몸과 영혼을 홀렸습니다. 감히, 당신을 사랑해서 나의 분별력마저 잃어버렸습니다.

 

닿을 수 없는 언어는 그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아스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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