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내내 정오正午의 궤를 그릴 이들에게
비화 님 (카츠라 코타로랑 약혼한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원작 세계에 건너오게 된 사유네)
글/썰

  사유네라면 갑작스러운 트립으로 원작 세계로 갔을 때 엄청 당황해서 패닉에 빠지거나 하진 않았을 거 같음. 살아온 시간과, 겪어온 것들이 너무 많고 쌓아온 지혜와 타고난 침착함 있으니. 게다가 사유네는 세계에서 흐르는 미묘한 이질감을 바로 알아챘음. 크게 주의 깊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게 항상 자신을 보면서 살갑게 인사를 해주던 카부키쵸 사람이 무표정하게 지나가든지, 실수로 어깨가 부딪혔을 때 늘 미안해하며 눈꼬리를 흘리던 양이지사 중 하나도 오히려 짜증을 버럭 내고 지나간다든지. 이쯤 돼서 사유네는 깨달았음.

 

'나는 이 세계에 없는 존재구나, 이곳은 내가 없는 세계구나.'

 

  사실 충격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음. 자신이 아주 오랜 시간 마음을 맡긴 사람들이 나고 자라고, 때로는 죽기도 하고, 열렬하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치열하게 싸워왔던 곳에서 잊혔으니 당연한 거임. 사유네는 확인받기 위해 바로 카츠라를 찾아갔음. 하지만 그는 코타로 군이라는 말에도 반응 없이 어디서 양이지사가 숨어있는 은신처가 발설되었냐는 말과 함께 사유네를 경계할 뿐이었음. 진선조에서 온 첩자가 아니냐고 대놓고 의심하면서 적대감을 보이기까지 했음.

 

  이런 상황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절망하고 무너졌을 거임. 하지만 사유네는 포기하지 않았음. 그렇게 간단히 포기할 거라면 그를 선택하지도,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임. 살아가면서 얻어온 각종 지식이나 생존 방식을 통하여 사유네는 가부키초에 다시 자리 잡아가기 시작함. 다만 출중한 외모와 정상적인 인간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지식, 고아한 말투 등 때문에 사유네라기보다는 북부의 신으로 섬겨졌을 듯. 살던 곳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유네의 기본 가치관이 바뀌는 건 아님. 그래서 자신의 지식을 아낌없이 베풀어서 애초에 시라카베 사유네라는 존재가 없는 이 세계에서도 기꺼이 지식을 나누면서 힘들어하는 인간들을 도왔을 거임.

 

  인간들을 돕는 것과, 결과적으로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원래 세계의 약혼자를 상실하고 이곳의 카츠라는 자신을 적대한다는 것에서 기인한 밝힐 수 없는 괴로움으로 종종 힘들어할 듯함. 그렇지만 옛날 고서와 지식들을 모아본 결과 이런 평행세계로의 이동은 일정 시간이 지나고 자연스럽게 세계가 다시 균열을 수습하는 순간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정보를 얻게 됨. 이런 순간이 확정적인 기간제라는 것을 알게 된 사유네는 다시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됨. 자신이 사랑하는, 또한 자신이 사랑받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그를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함. 희망을 가진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과 일맥상통함.

 

  한편 원래도 인간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희망이라는 존재를 깨닫게 되고 더 잘 웃는 사유네. 자신을 바라보면서 은연중 타인을 떠올리는 것 같던 사유네가 자기 자신 자체에 대해 집중한다는 것을 깨달은 이곳의 카츠라는 흔들리기 시작함. 점점 사유네라는 존재 자체가 새로운 가부키초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으면서 이곳의 카츠라의 마음에도 사랑이라는 이질적인 감정이 자리한 것임. 이곳의 그는 어린 시절 사유네를 본 적이 없으니 이 감정이 너무나 생경하고 또한 아플 정도로 뜨거웠을 것임. 사유네 세계의 카츠라는 전쟁을 겪기 전에 사랑에 빠졌던 거라서 조금 순수했고, 그 자체로 올곧은 사랑이었다면 이곳의 카츠라는 겪어온 것도 지킬 것도 많고, 그만큼 무수히 잃은 것이 많아서 그 과정이 더욱 힘듦. 그래서 해결사 삼인방 등이 이제 그를 사유네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게 이 감정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탓에 카츠라만이 끝까지 '시라카베 님'이라는 호칭을 유지할 것 같음. 고통과 사랑, 달콤함과 괴로움을 분간 짓기 어려울 정도임. 때로는 사유네와의 대화에서 그가 자신을 다 아는 듯 읽어내는 미묘한 기분까지 받음. 하지만 그것이 불쾌함을 유발하지는 않는 것이 사유네의 시야 속에 있는 것이 카츠라 코타로라는 사람이라는 건 사유네의 행동과 시선, 그리고 모든 순간에서 다 느껴지기 때문임. 애초에 알던 것처럼.

 

  사유네는 사유네 대로 자신을 향해서 다시 연정을 품는 카츠라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복잡할 것임. 자신이 사랑하는 카츠라에게 돌아갈 것이고, 모든 카츠라의 생애와 모습을 사랑한다지만 이곳에 그를 놓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균열이 고쳐지고 사유네가 이곳을 떠날 즈음이 되었음. 자신이 이 세계로 왔을 때와 동일한 증상을 느낀 사유네는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음을 본능적으로 느낌. 아직 이 세계의 카츠라 코타로라는 존재와 이별하는 방법을 제대로 정하지 못했는데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 하지만 생각만 해서는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사유네는 카츠라에게 달려감. 발끝부터 서서히 사라져가던 사유네는 도착하자마자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츠라에게 이렇게 말할 거 같음.

 

"사유네라고 불러주겠니, 코타로 군."

 

  그것은 자신의 안에 카츠라 코타로라는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을 것이고, 당신이 가지는 이 감정이 죄악이 아니라는 것을 사유네의 방식으로 증명해주는 하나의 깊은 고해였음. 카츠라는 눈앞에서 마음을 전하지도 못한 첫사랑이 사라지는 것을 망연히 보다가 사유네의 마지막 모습이 빛무리처럼 남아있을 즈음에야 중얼거리는 것처럼 '사유네….'하고 중얼거렸음. 그것은 그 어떤 고백보다 강렬한 고해였음. 마지막에 잔상처럼 사유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남아있는 것만 같았음.

 

  그렇게 돌아온 사유네는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은 자신의 원래 세상에서 오롯이 기억을 가지고 사랑하는 카츠라 코타로와 무사히 결혼까지 감. 평행세계에서 만난 또 다른 카츠라가 행복하기를 마음으로 비는 것은 습관이 되었겠지만. 그리고 평행세계의 카츠라도 힘들 때마다 시라카베님이 아닌 사유네에게 기도하면서 생을 버티고, 멋지게 살아갈 것임. 어느 세계든 카츠라 코타로는 사유네가 사랑하는 그 모습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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