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내내 정오正午의 궤를 그릴 이들에게
비화 님 (ver.모브 시점)
글/소설

"아, 사유네 씨! 또 오셨군요!"

"어머, 오늘도 그대가 일하는 모양이네. 힘들진 않니?"

 

  그 사람 특유의 백발이 나붓하게 흔들렸다. 문가에 선 사유네 씨는 고생하는구나, 하고 첨언하며 안으로 몸을 들였다. 경제적인 문제라는 멋없는 소리를 하거나 당신이 자주 방문하기 때문에 일하는 일자를 늘렸다거나의 이야기를 할 용기는 없었다. 언제나처럼 자리를 안내해주니 사유네 씨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같은 자리구나. 그대는 매번 나에게 이 자리를 안내해주는 거 같은데."

"아, 그, 그런가요? 아무래도 이쪽이 서빙하기도 쉽고, 예! 아무래도 사유네 씨는 여러 술을 드시는 걸 좋아하시니까요. 돔 페리뇽을 섞은 돔 페리뇽이라거나, 아무래도!"

"아무래도를 세 번이나 말했단다."

 

  속이 뜨끔하였으나, 애써 웃음을 유지했다. 물론 말이 몇 번이나 엉망으로 뒤섞였기 때문에 티가 났을 터다. 의도적으로 같은 자리를 안내했냐고 물으면, 당연히 의도였다. 그야 내가 서 있는 카운터 자리에서는 이 좌석이 가장 잘 보이니까. 사유네 씨의 시야에선 내가 잡히지 않지만 내 눈에서는 그분이 벗어나지 않는 최적의 구도. 바라만 볼 수 있으면 좋다, 같은 시답잖은 순애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유네 씨의 시선과 정면으로 맞닥뜨릴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내 속을 다 읽은 것 같은데도 사유네 씨는 별다른 반문 없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멋쩍게 메뉴판을 펼쳐드렸더니 오늘은 평소보다 고민이 길다. 항상 즐겨 드시는 술이 분명히 있어서 그것은 차게 식혀두었고, 새로 들어  온 전통주는 또 따뜻하게 데워 놓았다. 나올 준비는 다 되어 있단 말이다. 단지 '준비성이 철저하구나.' 하는 칭찬을 듣고 싶다는 이유였다. 가끔은 이리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구애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좋은 결말을 볼 거란 자신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이곳에는 어떤 술이 좋으냐고 물어오는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남색의 숄을 고쳐서 걸치는 그 우아한 태를 볼 때부터 마음에 그분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사실, 이미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사유네 씨, 혹시 오늘은 마음에 드는 메뉴가 없으신가요? 아니면 항상 드시던 거로……."

"아, 그게 아니고. 오늘은 같이 마시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같이 마실 사람의 취향을 고민하다 보니 생각이 길어지네. 조금 기다려주겠니. 마음이 결정되면 다시 부를 테니."

"……즈라 씨인가요?"

"즈라가 아니라 카츠라야. 그대가 이름을 틀린 걸 코타로 군이 들으면 또 역정을 냈겠는걸."

 

  사유네 씨가 연신 웃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자리를 비켜달라고 좋게 타이르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카운터로 돌아왔다. 괜히 마음이 꼬인다. 카츠라 코타로, 그 한량 같은 놈이 여기에 온단 말인가. 게다가 나도 해 본 적 없는 사유네 씨와의 단독 술자리를 갖는다니. 정체 모를 이상한 인형 탈과 같이 가부키초를 이리저리 오고 가는 것을 볼 때도 없었던 더러운 심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실 엄청 이상할 건 없었다. 마다오 같은 놈들도 판을 치는 에도가 아닌가. 어디서 본 얼굴이다, 라는 감상이 전부였다. 그놈이 사유네 씨와 같이 다니는 것을 우연히 보기 전에는 말이다.

 

'코타로 군.'

'사유네, 갑자기 볼을 찌르는 행위는 어린애를 대하는 장난이니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귀여운 걸 어쩌겠니.'

 

  두 사람이 길에서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왜일까, 마음이 심히 뒤틀렸었다. 사유네 씨는 대부분의 사람을 다정하게 귀여워하는 분이고 카츠라가 아니더라도 여럿을 그런 식으로 대했는데 왜 그 사람에게만 유독 빈정이 상했을까. 그렇게 몇 초간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서야 깨달았다. 카츠라가 사유네 씨를 보고 있는 시선은 내가 그분을 바라볼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점을 말이다. 동족에게서 느끼는 경쟁심, 내가 차지할 수 없는 위치를 독점하고 있다. 두 사람의 사이는 한눈에 보아도 나와 사유네 씨의 관계보다 훨씬 가까워 보였다. 그 순간 이후로 나는 카츠라 코타로를 싫어했다.

 

"저기, 상념을 방해해서 미안하네만 다섯 번쯤 부른 뒤라."

 

  바로 코앞에서 들려오는 카츠라의 목소리에 겨우 그때의 회상에서 깨어났다. 언제 들어온 건지,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하여간 얼굴 좀 꽃미남이고, 하는 짓 좀 바르고, 말투 좀 우아하고, 인망 좀 있는 놈이 뭐가 나보다 낫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다. 절대적인 기한의 차이인 건가? 그런 건가? 속으로 온갖 독설을 쏟아내면서도 착실하게 주문을 받았다. 평소에 사유네 씨가 드시던 것보다 명백하게 순한 사케와 늘 드시던 빙어튀김. 아마 이 녀석은 사유네 씨보다 술도 못 하는 모양이다. 

 

  솔직히 내가 지금껏 그분이 취한 걸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어디 안색이 안 좋은데 나와 사유네가 가게를 닫고 갈 테니 먼저 들어가도 괜찮네."

"아닙니다. 그냥 재수 없는 놈을 오늘 좀 봐서요……."

"진선조인가!"

 

  너다.

 

  목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누르고 그가 사유네 씨에게 붙들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는 듯 난처하게 웃으시는 얼굴을 보니 또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나를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고 계신 거 같다. 그리고 그런 능숙한 점이 또 한 편 너무 귀여운 거였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는 두 사람의 대화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조용하면 됐겠지만 여기는 다른 사람들도 방문하는 술집이니까. 게다가 사유네 씨의 뒷모습만 보이는 상태였다.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지금 하염없이 카츠라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는 잘 웃지도 않고, 시종일관 진지한 상태로 작게 입 모양만 움직이는 편이라 오히려 더 힘들었다.

 

  그사이에 같은 접시를 스무 번쯤 닦고, 같은 자리를 서른 번쯤 밀고, 같은 술을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보충하고 나니까 슬슬 파할 기미가 보였다. 사유네 씨가 들어올 즈음에는 어스레하게 해가 지고 있었던 거 같은데 이제는 벌써 해가 뜨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을 미친 듯이 경계하고 있느라고 시간 가는지도 몰랐다. 사장님이 그만 가라고, 혹은 다른 사람들의 주문도 받으라고 나에게 역정을 내는 것도 전혀  못 들었다. 결국, 나와 그 두 사람만이 최후의 잔류자가 되었다.

 

"아니, 그러니까."

"코타로 군, 엄청 취했어."

"취했어가 아니라 카츠라다."

 

  옷소매로 살짝 입을 가리며 웃던 사유네 씨가 카츠라를 가볍게 부축했다. 저런 녀석은 그냥 버리고 가버리면 될 텐데. 여러 방면으로 저분을 힘들게 만드는구나 싶어서 마음속에서 점수가 또 까였다. 거기에서 나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사유네 씨가 계속 짓고 있다는 것도 저평가에 한몫했다. 저런 표정을 지어서야 정말로 내가 끼어들 곳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 않은가. 그런 건 싫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단단한 사람인 것과 내가 끼어들 수도 없이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다르다.

 

  얼른 카운터에서 나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슬쩍 부축을 도와주는 척 사유네 씨에게서 저 녀석을 떼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데 두 사람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타로 군, 이렇게 주사를 부리는 것도 꽤 귀여운걸."

"그렇게 누님처럼 말하지 말란 말이다……."

"따지자면 코타로 군보다 훨씬 연상은 맞는데."

 

  카츠라는 제대로 문장이 되지 않는 소리를 옹알옹알 뱉어냈다. 시뻘게진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힘이 쭉 빠져서 사유네 씨의 어깨에 얼굴을 푹 기대었다. 찰랑거리는 머리가 가볍게 쏟아지는 듯 떨어졌다. 그 사이로 다시금 말이 이어졌다. 

 

"나는 항상 옆에 있는 누나로는 만족이 안 된단 말이다……."

 

  그 말은 거의 고백처럼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사유네 씨의 기척을 살폈다. 분명히 그를 밀어낼 거라 생각했는데 그분은 가만히 웃는 표정으로 반쯤 잠든 카츠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 안다는 듯한 미소, 그리고 어딘가 복잡한 기색. 나는 저 표정을 알고 있다. 무엇에 흔들리는 사람이 짓는, 그런 내밀한 감정. 순간적으로 심장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런 거였나. 나와 다르게 저 남자는, 완전한 일방향이 아니었던 건가. 그것을 절절히 깨닫는 건 너무나 끔찍한 기분이다.

 

  내가 뒤에 있는 걸 아셨는지 카츠라의 허리를 감싸 지탱한 사유네 씨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너무 오래 있어서 피곤하지 않니? 웃돈을 테이블에 두었으니 용돈으로 하렴. 다음에 또 올게."

 

  일말의 끼어들기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다. 그런 선 긋기는 지금껏 수없이 느낀 감정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정말로, 앞으로도 내가 저 남자보다 우위에 설 수는 없다는 걸 선고하는 것 같았다. 고백조차 못 하고 차인다는 건 이런 감각일까. 내 대답을 듣지 않고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겨우 입술을 떼었다. 들리지도 않을 대꾸였다.

 

"다음에, 또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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