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흩날리는 캠퍼스, 왁자지껄한 동아리실, 두근거리는 과팅. 사람들이 대학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개 그런 법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신입생에 한정된 이야기. 끝이 없는 과제 산더미, 팀플 회의 전날 잠수 타는 인간들, 얄짤 없는 교수 등에 지칠 대로 지쳐 대학의 로망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진저리 칠 만큼 지긋지긋한 게 졸업 학년인 4학년의 의의였다.
오늘은 꿀 같은 공강. 4학년이 되고 난 후 유일하다시피 좋은 점을 꼽자면 듣는 강의 수가 줄어 평일 5일 중 공강인 날이 과반수라는 것 정도였다. 테이블에 앉아 센치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카츠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는 터무니없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벚꽃을 구경하고 있자니 그의 첫사랑이자 현재진행형 사랑—본인은 강력히 부정 중인 시라카베 사유네가 떠오른다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얌마, 즈라. 너 또 사유 생각 중인 거냐?"
"즈라가 아니다. 카츠라다!"
"이제 잊을 때도 됐다~ 엉? 벌써 몇 년이냐? 십 년은 훌쩍 지났겠네."
전부터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런 게 아니래도! 엄한 얼굴로 호통치는 카츠라와 달리 소파에 누워 배를 벅벅 긁으며 티비를 보는 긴토키는 늘 그렇듯 세상만사 무심한 표정이었다. 대체 누가 사유네 생각을 했다는 거냐. 애초에 난 그 이름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긴토키 네 녀석은 어떻게 내 마음을 읽은 거지? 아니, 이런. 스스로 인정해 버렸군. 어찌 됐든 난 결코 사유네 생각을 한 게 아니, 띵동.
질린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평소처럼 코를 후비던 긴토키의 귀에 따발총을 쏘아대던 카츠라의 말이 뚝 멈추었다. 갑자기 초인종이요? 남자 셋이 사는 집에 이렇게 갑자기?
"어~이, 타카스기. 너 요구르트 주문했냐?"
"……시켰, ……."
"그래그래, 그럼 네가 나가 보면 되겠네."
"타카스기는 샤워 중인데 어떻게 나가라는 거냐! 무엇보다 타카스기는 안 시켰다고 했다. 티비 소리를 그렇게 크게 키워둔 네 녀석에겐 들리지 않았겠지만."
"그래그래, 그럼 즈라가 나가 보면 되겠네. 보다시피 긴 씨는 누워서 티비 보느라 바쁘걸랑요."
"하아, 이 녀석들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결국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푹 내쉰 카츠라가 현관문으로 향했다. 긴토키나 타카스기와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꼬꼬마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고 있다지만, 왜 이런 귀찮은 일은 항상 자신이 떠맡게 되고 마는 건지. 새삼스레 제 신세를 한탄한 카츠라는 문고리를 당기기까지 초인종을 누른 이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집을 잘못 찾아왔거나, 잡상인이거나, 긴토키가 또 인터넷으로 무언가를 주문했거나…… 뭐, 그런 거겠지. 그렇기에 문을 열었을 때, 방금까지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시라카베 사유네가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예, 지금 나가…… 으허?"
대체 얼마나 놀란 건지 늘 엄격, 근엄, 진지로 이루어진 그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이건 꿈인가? 아, 그래. 꿈인 거로군. 그렇지 않고선 눈앞에 있는 여성이 사유네로 보일 리가 없지. 아무리 사유네 생각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고 있다지만, 이건 좀 오바 아닌가? 자신이 한창 사랑에 빠진 사춘기 남학생도 아니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대학교 졸업반이란 말이다, 이 카츠라 코타로는! ……아, 어쩌면 졸업과 취업 스트레스로 헛것을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게 바로 그 좋은 예시가 되겠군. 하하하!
"저기…… 괜찮으세, 어라? 혹시 코타로 군?"
"……."
"코타로 군, 맞지?"
방금 막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고 한 참이긴 하다만…… 헛것을 보는 것도 모자라 어릴 적 기억하는 사유네의 목소리와 눈앞의 여성의 목소리까지 똑같은 건 정말 반칙이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말투도, 자신을 부르는 호칭도. 호칭……. 호칭. 혹시 내가 이름이 적힌 명찰이라도 달고 있었나? 교복을 입는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인데? 그것도 집에서? 카츠라는 그제야 뒤늦게 이 말도 안 되는 우연이 겹치고 겹친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 사유네? 정말 사유네란 말인가?!"
"응, 계속 아무 말도 없어서 내가 착각한 줄 알았지 뭐야. 역시 코타로 군이잖아~ 아무리 못 본 지 오래됐다지만, 그렇다고 날 잊은 건 아니지?"
"물론이다! 아니, 너무 당황스러웠던 나머지……. 그런데 사유네, 자네가 여긴 어떻게……?"
"여기 옆집으로 이사 왔거든, 나. 그래서 이웃들한테 선물을 돌리던 참이었어. 그런데 이렇게 코타로 군을 만나게 될 줄은……."
무려 십이 년 전에 연락이 뚝 끊겼던 첫사랑이 옆집에 이사 올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영화 시나리오도 이렇게 쓰면 이게 무슨 말이 되는 우연이냐며 욕을 먹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사유네는 한 손에 이사 선물을 들고 있었다. 봉투가 하나인 것을 보아 아마 카츠라네 집이 마지막인 듯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긴토키 군이나 신스케 군이랑도 여전히 친하고?"
"아아, 그렇지 않아도 당장 같이 사는 참이다. 녀석들과는 여러모로 지독한 인연이로군……. 그러고 보니 사유네, 자네는 무슨 일로 도쿄로 이사를? 분명 본가인 홋카이도로 돌아갔던 것으로 안다만."
"후후. 여전히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아, 응. 사실 나, 결혼했거든. 이번에 남편 직장 발령이 본사인 도쿄 쪽으로 나서 이사 오게 됐어.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누나가 갑자기 아줌마가 돼서 놀랐으려나?"
아마 카츠라가 다시 정신을 놓은 건 결혼이라는 단어가 들린 뒤부터였다. 그러니까, 사유네가, 결혼을, 했다고. 사유네가 결혼. 사유네가…… 결혼. 중간중간 남편이나 아줌마라는 단어가 들린 걸 보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결코 아닌 모양이었다.
눈앞에 나타난 게 사유네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제발 이게 꿈이 아니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랐건만. 지금은 차라리 꿈이길 바라고 있다. 연애도 아니고 결혼이라니. 그렇다면……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가망이 아예 제로가 되는 것도 모자라 소멸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유네의 말에 대충 대답하고, 다음엔 제대로 준비하여 긴토키와 타카스기에게도 인사하러 오겠다는 그녀를 배웅해 주지도 않고 멍한 얼굴로 집에 들어온 카츠라는 누가 봐도 실연당한 남자의 표정이었다. 거기다 한 손에 들고 있는 이사 선물도 내려두지 않은 채 곧장 소파에 앉아 버리는 바람에 이미 소파에 누워 있던 긴토키의 허리가 나가는 소리가 빠득, 하고 울려 퍼졌다.
"즈라! 네 녀석 눈이 제대로 달려 있긴 한 거냐?! 방금 긴 씨 허리 나가는 소리 들리지 않았어? 어?! 아직 창창한 이십 대 청춘인데 벌써부터 허리 망가지고 싶지 않거든? 자고로 남자는 허리가 생명이라굽쇼!"
"어어, 그래……."
"……대체 뭐 하고 있는 거냐, 너희들은."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타카스기가 바라보고 있는 광경은 코미디 그 자체였다. 허리를 부여잡고 난리난리생난리를 치는 긴토키가 뭐라고 하든 말든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는 카츠라. 타카스기는 그들을 한심하단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혀를 쯧쯧 차며 머리를 말리러 가려다가, 문득 카츠라가 들고 있는 봉투가 눈에 들어와 초인종을 누른 이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누구였지? 찾아온 건."
"사유네……."
"뭐야, 사유였어?"
"사유네였군."
얼마나 믿기지 않았던 건지, 긴토키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냉철하고 이성적이라는 타카스기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결국 한참 후에서야 카츠라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타카스기가 다시 한번 질문했고, 긴토키도 또 한 번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말도 안 돼. 즈라, 네가 헛것을 본 건 아니고?"
"즈라가 아니라 카츠라다. ……그래, 사유네였다. 우리 바로 옆집에 이사 왔다더군. 남편의 직장 발령 때문에 도쿄로 왔다는 모양이야."
"잠깐, 남편?"
"그래, 남편. ……하아."
물론 긴토키와 타카스기 또한 카츠라와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사유네와 아는 사이였고, 그런 사유네가 말도 없이 훌쩍 떠나더니 지금은 결혼을 했다니 놀라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카츠라 코타로에게 시라카베 사유네는 자신들처럼 그냥 어릴 적 알던 누나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사유네가 어떤 의미를 갖는 사람인지 알고 있는 두 사람은 좀 전의 카츠라와 같은 표정으로 말을 잃었다.
*
며칠 후, 긴토키, 타카스기, 카츠라, 거기에 은혼고등학교 동창인 사카모토 타츠마까지 더해 총 네 사람이 모이게 된 일이 있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집안의 사업을 잇겠다던 사카모토가 최근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차린 무역 회사가 대박이 터지며 이는 다 응원해 준 너희의 덕분이니 자신이 한턱 쏘겠다며 세 사람을 부른 것이었다.
갓 스물이 되었을 무렵 네 사람이서 자주 가던 익숙한 호프집에서 이야기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네 사람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마시고 떠들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자연스레 그날의 이야기로 주제가 흘렀고…… 카츠라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호오. 그래서 그 사유네란 여성분이 어떤 사람이었길래 그러는가?"
"사유가 어떤 녀석이냐면 말이지~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즈라의 첫사랑?"
"우리가 여덟 살 때 처음 만났고, 열 살 때 사유네가 본가로 돌아갔으니…… 벌써 십이 년이나 흘렀군."
"히엑. 이건 뭐, 순정 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말임세……. 어찌 됐든 그 사유네라는 분이 즈라의 첫사랑이란 거군~ 그런데 유부녀라면 즈라의 취향 그 자체 아닌감?"
"즈라가 아니다, 카츠라다! 그리고 정확히는 유부녀가 취향인 게 아니라, NTR이 취향인 거다."
"그게 그거구만, 뭘……."
그 후로는 폭발한 즈라, 아니, 카츠라가 빈 그릇을 집어던지는 것부터……. 하여튼 엉망진창이었다. 대충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카츠라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물론 사유네가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좋아해 왔으니 유부녀인 사유네를 좋아한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이 마음으로 인해 사유네가 곤란해지지는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결혼을 할 정도라면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일 텐데, 제 마음을 들켰다간 사유네의 입장도 곤란해질뿐더러 이사 오자마자 괜한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 물론 겨우 이어진 지금의 이 관계를 다시 잃고 싶지도 않았고.
"하아……. 그래,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긴토키는 파칭코, 타카스기는 선약이 있다며 외출한지라 집에 남은 건 카츠라 혼자였다. 고개를 휘휘 내저은 뒤 다시 과제에 집중하기 위해 기지개를 쭉 펴던 중, 어딘가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거운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간간이 여자 비명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설마 사유네의 집은 아니겠지, 하며 창문 밖을 살피자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은 명백히 카츠라의 바로 옆집인 사유네의 집이었다. 사유네의 일이란 걸 안 이상, 카츠라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 물론 바로 직전에 자신이 계속 사유네를 좋아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긴 했지만,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이웃된 도리로서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자기합리화를 끝마친 카츠라는 망설이지 않고 집 밖으로 나섰다.
무작정 사유네의 집 앞까지 오긴 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역시 노크부터 하는 게 좋겠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킨 카츠라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먼저 벌컥 문이 열리며 웬 남자가 나타났다.
"뭐야. 넌 웬 놈이야?"
흥분한 상태였는지 남자는 귀 끝까지 벌게져 씩씩대고 있었다. 아무리 생판 남인 카츠라가 문 앞에 서 있던 탓에 어깨를 부딪쳤다지만, 이렇게 다짜고짜 반말부터 싸지를 일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시선도 영 불쾌해 카츠라의 미간도 절로 찌푸려졌다.
"왜 우리 집 앞에 서 있는 거지? ……설마, 내 아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아니, 그런 모양이군."
"여보……!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냥 어린 시절 친구예요. 아까부터 계속 얘기했지만, 괜한 사람 의심하지 말아요."
그리고 그 남자의 뒤를 따라 나온 게 사유네였다. 급하게 뛰쳐나온 건 사유네도 마찬가지였는지, 잠시 집 앞을 나오는 것뿐인데 사유네의 발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카츠라가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 사유네가 먼저 남자—그녀의 남편의 옷을 붙잡고서 시간이 늦었다, 어서 약속에 가야 하지 않느냐며 그를 살살 달래자 마지못해 남자가 혀를 쯧 차더니 카츠라의 어깨를 다시 한번 치고 걸음을 옮겼다. 덩그러니 남은 둘 사이에 미묘한 정적이 흐른다.
"미안해, 코타로 군……. 남편 때문에 많이 놀랐지. 음, 마침 점심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보다시피 남편은 약속이 있어서 혼자 먹어야 할 신세였거든. 코타로 군만 괜찮다면 같이 먹지 않을래?"
"아…… 음. 그러지."
"여전히 소바는 좋아하고?"
"그렇다. 소바를 대신할 음식은 없으니까."
어색하게 사유네의 집으로 들어서는 카츠라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사유네가 남편과 다투었고…… 그걸 목격한 자신은 정말 어쩌다 보니 어영부영 사유네의 집에 초대받고. 이런 식으로 사유네의 집에 와 보게 될 줄은 차마 몰랐는데.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실례하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하며 문지방을 넘었다.
사유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어쩌면 익숙하게 점심을 준비했다. 카츠라가 헛것을 들은 건 아님을 증명하듯 집 내부는 손님을 맞이하기에는 영 적절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러나 아무리 친근한 사이라고는 한들, 타인의 가정사를 캐묻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아는 이상, 섣불리 입을 떼기 조심스러운 면이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소바, 그것도 사유네가 직접 만들어 준 소바를 먹으면서도 이게 무슨 맛인지, 제대로 넘어는 가는 건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자 사유네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겠다 싶어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남편이랑은 집안끼리 정략결혼으로 만났어. 그런데 조금 의심이 많아서…… 저번에 코타로 군이랑 오래 대화 나눈 걸 보고 신경이 쓰였나 봐. 그래서 조금 다툰 것뿐이야. 걱정할 건 없어."
"조금 다툰 게 아니잖나! 싸우는 소리가 우리 집까지 다 들렸다고. 게다가 의심이라니. 남편이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도 믿지 못하는 건가? 사내 녀석이 여성에게 소리치며 위협하는 것만 봐도 그렇고. 영 못미더운 놈이다."
"후후……. 대신 화내 줘서 기뻐. 고마워, 코타로 군."
어쩌면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카츠라는 감정이 격해진 것도 맞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탁자 밑에 쥔 손에 힘을 가득 주면서도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혼, 은 생각해 보지 않은 건가?"
"으응. 그래도 그 점만 빼면 참 좋은 사람이거든. 괜찮아, 정말."
"그래. 자네가 그렇다면야…….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니, 나중에 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부르도록 해."
이런 식으로 사유네의 집에 초대받을 줄도 몰랐지만, 이런 이유로 전화번호를 교환하게 될 줄은 더욱 상상해 보지 못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뭔지……. 카츠라의 기억 속의 사유네는 늘 야무진 데다 똑 부러지고 타인의 도움 없이 제 할 일을 척척 해내는 여자였다. 그래서 결혼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분명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을 줄로만 알았다.
뭐가 어떻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어쩌면 다른 남자를 집에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하고, 그 남자의 전화번호를 받았다는 이유로 또 그 죽여 마땅한 망할 작자가 사유네에게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일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을 대비하여 지인이자 이웃인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 카츠라가 당장 사유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딱, 여기까지.
새삼 다시 한번 제 신세를 깨닫게 된 카츠라는 한숨을 푹 내심과 동시에 사유네의 집을 나설 때까지 표정에서 근심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
그 일 이후, 카츠라는 연일 사유네의 집을 예의주시했다. 또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이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만큼 사유네와의 연락도 잦아졌다. 카츠라는 주로 사유네가 걱정이 된다는 이유로, 사유네는 낯선 동네에 아는 이라고는 카츠라뿐이라는 이유였다. 게다가 마침 카츠라는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사유네는 사회 선배로서 유용한 정보나 팁들을 카츠라에게 전수해 주곤 했다.
"……야, 즈라."
"……."
"즈라, 얌마!"
"힉! 뭐, 뭐냐. 긴토키. 갑자기 사람 이름을 그렇게 크게 부르고."
"갑자기가 아니거덩? 아까부터 부르고 있었다고. 대체 누구랑 연락을 하길래 사람 말을 듣지도 못해? 아니면 귀지라도 쌓였냐? 긴 씨가 귀라도 파 줘?"
"아, 그랬나. 사유네랑 연락 중이다만, 무슨 일이지?"
어머, 어머. 신 쨩 댁, 들었어요? 글쎄 저 청년, 유부녀랑 연락 중이래요, 유부녀랑. 닥쳐라, 긴토키. 누가 신 쨩 댁이라는 거냐. 와하하핫! 즐거우니 그걸로 된 거 아닌가! 확실히 사유네가 유부녀라는 건 문제가 되긴 하겠다만…….
긴토키, 타카스기, 사카모토가 무어라 떠들든 말든, 카츠라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사유네가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양이즈의 눈엔 어떻게 해야 남편에게서 사유네를 뺏어올 수 있을지 궁리하는 당돌한 불륜남으로 보일 뿐이겠지만.
"하아. 물 좀 마시고 오지."
카츠라가 핸드폰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부엌으로 향하자, 무언으로 눈빛을 마주친 긴토키와 사카모토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후 아무 생각 없이 식탁으로 돌아온 카츠라가 다시 사유네에게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을 집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이것저것 알려줘서 고맙다. 사례로 밥이라도 사고 싶은데, 이번 주말은 어떤가?]
라는 자신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내용의 문자가 사유네에게 보내져 있었고, 긴토키와 사카모토는 뻔뻔하게도 어때, 우리 잘했지? 라는 표정으로 카츠라를 바라보며 엄지를 척하니 들고 있었다.
"긴토키, 사카모토오! 네녀석들, 대체 무슨 짓을……!"
문자 왔숑. 헉. 어디 어디, 뭐라고 왔는지 보자. 떠, 떨려서 못 보겠…… 에이, 이리 내놔 봐!
그렇게 해서 확인한 화면엔, [응, 좋아.]라는 짧고도 강렬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로써 카츠라와 사유네는 당장 모레가 되면 데이트를 하게 생겼고, 이렇게 양이즈의 '두근두근! 당돌한 연하남 즈라와 그의 첫사랑이자 유부녀가 되어 돌아온 사유네 이어 주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물론 카츠라가 의도한 바는 절대 아니었지만,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이런 찬스를 놓칠 이유도 없다. 그는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면서도, 자꾸만 눈치도 없이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아야만 했다.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찾아온 약속―데이트 날. 카츠라는 그다지 크지도 않은 옷장 문을 양옆으로 활짝 열어 둔 채 몇 번이고 현관 신발장에 딸린 전신 거울 앞과 제 방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이…… 대략 열여섯 번째던가? 그러게 당일 뭘 입을지 정도는 미리 정해 두라고 타카스기가 그리 일렀건만, 그럴 때마다 "다, 단순히 밥 한 끼 먹는 것뿐인데, 무슨 옷을 고른다고 그러나! 누가 보면 데이트라도 하는 줄 알겠군 그래!"라며 버럭 화를 내더니 결국 지금은 이런 꼴이다.
청재킷에 청바지? 아니, 이건 아무리 트렌드에 뒤처지는 카츠라라도 이건 아님을 알았다. 그럼 후드티에 면바지? 너무 어린애 같잖아. 탈락. 아! 면접용으로 사둔 정장 세트? ……무슨 선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 옷차림에 맞는 신발이…… 아? 젠장! 긴토키 녀석, 또 말도 없이 남의 신발을 신고 간 거냐! 모자는 너무 꾸민 것 같나? ……. 이러한 관계로, 카츠라는 옷을 고르는 데에만 대략 세 시간이 걸렸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며칠 전부터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린 탓에 주말임에도 불과하고 아침 일곱 시가 되자마자 눈이 떠졌다나 뭐라나. 그래도 덕분에 약속 시간에는 늦지 않게 되었다. 세 시간 동안 고른 옷이라기엔 평상시에 입는 옷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하아……."
아무리 멋을 부려도,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국 사유네는 어엿한 가정과 남편이 있는 유부녀.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것도 결국 과거에 인연이 있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평소 입고 다니는 흰 티에 체크 남방셔츠를 걸친 카츠라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해 있으려던 계획과는 다르게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을 정도로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자신과 사유네가 사귀는 것도 아닌데, 굳이 잘 보이려 노력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레 발걸음이 늦어진 탓이었다.
"아, 코타로 군. 여기야."
"사유네! 먼저 나와 있을 줄은……. 오래 기다렸나?"
그 생각은 먼저 약속 장소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유네를 보자마자 막 시험을 끝낸 대학생의 머릿속처럼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크흑……. 여성을 기다리게 하다니, 난 남자도 아니다! 아마 사유네가 볼 수 없는 상황이었더라면 카츠라는 자신의 허벅지를 몇 번이고 주먹으로 내려쳤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유네의 앞. 말 하나, 행동거지 하나에 주의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오래 기다리긴. 이 동네 이사 오고 나서 장 보는 거 말곤 돌아다닌 적이 없어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일찍 나온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가……. 아, 뭔가 먹고 싶은 건? 오늘은 내가 사기로 한 거니, 자네가 먹고 싶은 거로 뭐든 말하게."
"음~ 그럼…… 텐동? 텐동 좋아하거든."
"아, 텐동이라면 마침 잘 아는 곳이 있다! 그쪽으로 가지."
식당으로 향하는 길은 여러모로 완벽했다. 날씨, 분위기, 대화 주제까지 모두. 이래선 누가 봐도 데이트라 해도 영락없는 모양새였다. 실제로 아직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유네에 대해 잘 모르는 아주머니가 지나가던 카츠라를 발견하더니 "어머, 코타로~ 옆에 고운 아가씨는 누구니? 드디어 여자친구?"라고 하기도 했고. (그런 거 아니라며, 소꿉친구일 뿐이라고 열 번 정도 말하고 나서야 아주머니는 오해를 푸셨다.) 어쩐지 그 이후로 카츠라의 기분이 전보다 더 업된 것 같았으나, 그의 눈곱만큼 남은 명예를 위해 굳이 지적하진 않도록 하자.
어찌 됐든 도착한 텐동집은 전부터 카츠라를 포함한 삼인방이 자주 가던 가게였기에 주문부터 아주 수월했다. 단골 서비스라며 튀김 몇 점을 더 얹어 줘 사유네가 무척 기뻐하기도 했고. 카츠라는 밥이 입이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흐뭇해했다. 이렇게 밝게 웃는 사유네를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다음에 또 오면 사케 한 잔 내어 주겠다는 주인장의 말에 사유네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으니, 이렇게 다음 데이트 기회도 잡게 된 셈이다. 주인장, 내 다음에 기필코 돈쭐을 내 드리겠소.
데이트의 정석, 식사 다음 코스는 카페. 두 사람은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사실은 카페라테를 주문하고 싶었으나 조금이라도 어른스러워 보이려는 카츠라의 노력―를 주문하고 사람이 많지 않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코타로 군, 커피도 마실 줄 알고 이제 어른 다 됐네? 옛날엔 내가 코코아 타 줬었는데."
"크흠! 자네는 내가 몇 살이라 생각하는 건가. 나도 어엿한 성인이란 말이다."
"그럼, 알지. 그래도 내 눈엔 평생 어린아이처럼 보이는걸."
아아…… 이렇게 못을 박다니……. 만화였다면 카츠라의 눈에서 눈물이 퐁퐁 흐르는 연출이 나왔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기도 잠시, 사유네가 음료를 마시기 위해 팔을 위로 뻗은 순간 가벼운 소재의 옷 소매가 팔꿈치까지 흘러내렸고, 카츠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유네의 팔을 붙잡았다.
"사유네, 이건……!"
"응? 아, ……."
새하얗고 가느다란 사유네의 팔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절대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넘어져서 생긴 멍이 아니었다. 성인 남성의 손 크기 그대로 자국이 남아 있었으니까. 카츠라의 표정이 급격히 심각해지자 사유네 또한 재빨리 그에게서 팔을 빼내고 옷매무새를 정돈했지만, 그래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설마…… 남편이 그런 건가?"
"아, 아니야……. 그냥 내가, 나 혼자서……."
"사유네."
이토록 진지하고 걱정스러운 카츠라의 표정은 예나 지금이나 처음이었다. 결국 사유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츠라는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당신을 사랑했고, 그랬기에 그 누구보다 당신의 행복을 바랐는데……. 그 작자를 향한 분노보다 앞선 것은 사유네의 걱정이었다. 전의 행실을 보아하니 결코 처음이 아닐 텐데,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주변에 털어놓을 친구 한 명은 있었을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 카츠라는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눈가가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게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아서. 그가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사유네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렸다.
"사유네, ……자네는 결코 이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으응……. 그래도 그 점만 빼면 참 좋은 사람이야."
"그 점만 빼면 좋은 사람 같은 건 없네. 그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사람이다!"
순간 카츠라의 목소리가 커지자 카페 내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 난 곳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카츠라가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네고, 사유네 또한 전부 안다는 듯 씁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녹아버린 얼음 탓에 맛이 밍밍해진 커피를 반절 이상 남겨 두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옆집이라 바래다준다기엔 뭐 하지만, 같은 방향이니만큼 카츠라와 사유네는 나란히 걸으며 함께 귀가했다. 카페를 빠져나온 이후로도 많은 대화가 오가긴 했으나 팔에 있던 멍이나, 남편에 관한 이야기는 더는 나누지 않았다. 카츠라의 마음 같아선 당장 이혼하라고 펄펄 뛰고 싶었지만…… 자꾸만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사유네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단지 내가 사유네를 좋아하니까, 사유네를 차지하고 싶다는 이유로 다른 핑계를 빌미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사유네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보니 금세 사유네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현관문 앞에 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사유네의 남편이었다.
"뭐야, 왜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거야? 역시 바람이지, 그렇지?!"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자세히 보니 이 새끼 저번에도 사유네 주변에 얼쩡거리던 놈 아냐? 하, 참 나……. 그땐 그냥 어린 시절 친구라더니, 그냥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였나 봐? 어?"
남자의 손이 높게 올라가 사유네의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제 버릇 어디 안 간다고, 남들이 보든 말든 손찌검을 하려는 모양새에 사유네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남자를 말린 것은 당연 카츠라였다.
"네놈, 미친 거냐?! 여자에게, 그것도 자신의 부인에게 손찌검이라니!"
"하? 내연남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 넌 저리 꺼져! 이건 나랑 사유네의 일이라고!"
"……잠깐 비켜 줘, 코타로 군."
남자가 사유네에 대하여 모르는 점은 하늘에 있는 별만큼이나 많았지만, 당장 그중 하나를 꼽자면 사유네는 명문가 아가씨이기 전에 아주 오랜 시간 검도를 수련한 유단자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결혼 후 수련을 할 환경이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남편의 바람대로 다소곳한 현모양처로 지내기 위해 검도와는 먼 삶을 살아온 사유네였으나……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힌 무술이 어디 한 번에 사라지겠는가? 급소 중 하나인 턱을 가격한 뒤 두 손으로 팔을 붙잡고 무게를 실어 몸을 뒤집자 그걸로 끝이었다. 쿵! 남자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고,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사, 사유네……?"
"코타로 군 말이 맞아. 그 점 빼고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렇지?"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사유네의 미소에 카츠라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반했음을 깨달았다.
*
그로부터 수일 후, 카츠라는 벼르고 벼르던 회사의 면접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집에서 가깝지, 사내 복지 좋지, 초봉도 나쁘지 않지. 자신이 바라던 최고의 조건이 전부 갖춰진 곳에서의 입사 면접이 성공적이었으니 기분이 좋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돌아가는 길에 소바라도 사 갈까……. 아니, 역시 이런 날은 양꼬치에 맥주?! 호화로운 고민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던 중, 회사 출입구를 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한 여성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코타로 군은 양복도 잘 어울리네?"
"사, 사유네?"
"응, 오늘 여기서 면접 본다고 했잖아?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 같이 저녁도 먹고 싶고, 마침 할 말도 있고 해서. 어땠어, 면접은?"
"아아, 그런 건가. 음, 질문도 예상했던 대로였고, 분위기도 아주 좋았다. 사유네의 덕이 크다고 볼 수 있겠군."
"어머, 그래? 다행이다. 도움이 됐다니 기뻐.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무슨……! 감사의 의미로 내가 사도 모자라거늘!"
"저번에 텐동 사 줬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내 차례. 저번에 갔던 텐동집으로 가자."
돌아가는 길에 사유네를 만나게 되다니. 거기에 저녁 식사까지 같이하게 되다니! 평소 같았다면 이게 무슨 횡재냐며 좋아했겠지만, 사유네를 만난 것은 그날 이후 처음이었기에 그녀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카츠라는 제 머리를 싸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의 사정을 안다는 듯 사유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입사하더라도 머리카락은 자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난 코타로 군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무척 좋거든."
"그, 그런가? 딱히 관리를 하는 건 아니다만……."
예상하지 못한 칭찬에 부끄러워진 카츠라가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는 동안, 중대 발표라도 하듯 사유네가 목을 몇 번 가다듬었다.
"참, 어제 법원 다녀와서 이혼 서류 제출했어. 전 남편도 이대로 끝내고 싶어 하는 것 같고. 이제 완벽한 돌싱이란 소리!"
"오오, 축하한다! 정말 기다리던 소식이었는데 말이지."
"후후……. 그래서 말인데, 고백은 언제 해 줄 거야?"
"……컥!"
카츠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뭐는 언제 해 줄 거야? 고백……? 지금 사유네가 고백이라고 한 건가……? 얼마나 당황했으면 사레라도 들렀는지 몇 번이나 기침을 한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아, 알고 있었던 건가……?"
"나랑 만날 때마다 그렇게 좋아하는데 당연히 눈치채지.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구, 코타로 군."
어안이 벙벙하다는 말은 딱 이럴 때 쓰는 모양이다. 대, 대체 언제부터……?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자꾸만 사유네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서 언제 고백할 거니?"
이렇게 된 이상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니, 말해야 한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바보 중의 바보라는 것 정도는 카츠라도 알았다. 전부 차려진 밥상,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단 한 가지뿐. 매일 밤 홀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던 그 말이 왜 지금은 이렇게 내뱉기 어려운 건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조심스레 사유네의 어깨를 붙잡는다. 그리고 그다음은,
"사유네, ……자네의 곁에, 연인으로서…… 머물러도 되겠나?"
"응, 물론이지."
텐동집 앞에서 하는 고백이라니. 우습다면 우스운 꼴이었지만, 뭐 어떠한가. 두 사람이 좋다면 그만이지. 조심스레 손을 맞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 연하남이 前유부녀를 쟁취하는 방법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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