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내내 정오正午의 궤를 그릴 이들에게
달한 님 [하얀 벽(白い壁)]
글/소설

※은혼 비공식 에피소드

※에피소드 순서: 영혼 교체편->하얀 벽->장군암살편

 

 

01. 실종 전단지를 만들 때는 우선 실종자가 TV에 등장하지 않는지 살펴볼 것.

 

날은 맑았다. 밝고 푸른 어둠이 달빛에 젖어든 밤. 사람들의 이야기소리와 따뜻한 술 냄새가 소란스럽게 어울려 특유의 분위기를 만드는 어느 술집에서, 한 사내와 여인이 서로 잔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코타로 군이랑 같이 마시는 것도 오랜만이네.”

 

느릿하게 잔이 기울어 입가에 닿고, 다시 천천히 내려오는 손길이 더없이 우아하기만 했다. 사유네는 제 앞에 앉은 상대를 향해 살짝 미소를 보였다.

 

그러게 말일세. 여긴 하나도 변한 게 없군.”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는 카츠라의 움직임도 단정하고 느릿했다. 술집의 조명이 쓸데없이 밝은 탓에 그의 귀 끝이 묘하게 붉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만 아니었다면, 분명 평범하게 이어졌을 대화의 한 장면이었다. 사유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붉은색으로 향했다가 가벼운 웃음으로 바뀐다. 귀엽다는 감상을 그대로 말하면 그가 싫어할 테지. 사유네는 그의 반응에 솔직한 대답을 내어놓는 대신 말하고자 했던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물론 입가엔 여전히 웃음이 담긴 채였다.

 

일이 생겨서, 잠깐 고향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그래서 당분간 얼굴을 보기 힘들 것 같은데.”

그럼 언제쯤 돌아오는 건가?”

아마 짧으면 2, 길면 한 달 정도.”

 

애꿎은 술병만 매만지던 카츠라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생각보다 좀 길군.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사유네의 예민한 귀에 잡혔으나 사유네는 그저 입가를 소매로 살풋 가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입안에 맴돌았다가 사라지는 중이 아닐까. 애써 짐작하지 않아도 그의 표정에서부터 전부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군. 조심해서 다녀오게.”

 

하지만 그의 입 밖으로 겨우 튀어나온 것은 단순한 한마디였다. 저렇게 생각이 다 드러나는 표정으로 무슨 말을 삼키고, 또 무슨 감정을 눌러냈을지. 잠시 잔을 든 채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사유네는 작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원래 고향에 다녀오면 주변인들에게 기념품 같은 걸 선물해준다고 하던데. 돌아오면 코타로 군에게도 하나 줄게.”

아니, , 나는굳이 신경 써서 주는 거라면.”

어머, 내가 주는 선물은 받기 싫은 거니?”

아니! 절대, 전혀 아닐세! 꼭 받고 싶네!”

 

거의 필사적으로까지 들리는 외침에 사유네의 입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제야 일부러 그녀가 짓궂은 물음을 건넨 것을 알아차린 카츠라가, 매만지던 잔을 내려두고 괜한 헛기침을 늘어둔다. 다시 사유네의 웃음이 흘러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어 미소가 담긴 사유네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카츠라의 음성과 섞여들고,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술집 안을 울리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 시간은 늦었으나 두 사람의 새벽은 아직이었다. 카츠라와 사유네는 이른 밤이 지나도록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달빛에 밝고 푸른 어둠이 완전히 녹아들 때까지.

 

 

그리고 이것이, 카츠라가 기억하는 사유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무려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났단 말이네, 긴토키!”

 

카츠라의 외침이 해결사 사무소에 울려 퍼졌다. 근심과 걱정을 표정에 담아낼 수 있다면 지금의 상태가 되었을 것이라 여겨질 만큼, 카츠라가 심각한 얼굴로 입매를 굳히고 있었다. 옆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듯 심각한 글씨체로 적힌 팻말이 엘리자베스의 손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까지 연락이 닿지 않은 적은 없었어요.’

아니, . 마차가 막힌다거나 그럴 수도 있는 노릇이고.”

…….”

 

평소라면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었을만한 긴토키의 대꾸가 의미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소파에 앉아서도 그로서는 드물게 불안한 자세로 안절부절못하던 카츠라는, 결국 벌떡 일어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저 고향에 다녀온다던 사유네의 소식이 끊긴 지도 벌써 한 달을 넘어 두 달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이 늦어져 들었던 대로 한 달 정도 걸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다면 조금 더 늦어진다는 연락이라도 왔을 텐데. 카츠라에게 닿은 소식이라곤 어디에서도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말 그대로 사유네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부분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던 카츠라를 이렇게 만드는 것에는 그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진정하세요, 카츠라 씨. 그냥 소식이 늦어지는 걸 수도 있잖아요.”

그건 이미 보름 전에도 들은 말 아닌가.”

 

사실 카츠라가 해결사 사무소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사유네가 예정했던 한 달이 다 끝나갔을 무렵, 지금과 비슷한 표정으로 이곳을 찾아왔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사고를 당하거나 범죄에 엮인 것인지, 혹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생긴 것인지 걱정이 되어서.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여상한 반응이었다.

 

, 고향에 간 거니까. 간 김에 휴식이라도 취하고 오는 게 아닐까요? 요즘 사유네 씨, 꽤 바빠 보이셨잖아요.’

그래. 사유 고향이면 홋카이도인데 금방 올 거리도 아니고. 아니면 뭐 그 녀석, 폰은 잘 안 가지고 다니니까 어디 놔두고 잃어버리기나 해서 연락이 없는 거겠지.’

분명 오는 길에 선물을 잔뜩 사오느라 늦는 거 다, ! 저번에 만났을 때도 약속했다, ! 그렇지, 사다하루?’

!’

 

그러니 얌전히 기다리기나 하라느니, 너무 집착하는 남자는 인기가 없다느니 하는 긴토키의 헛소리가 늘어진 하품과 함께 이어졌던 것이, 바로 보름 전이었다. 그래서 약간은 걱정을 덜고 걸음을 돌렸었는데. 다시 오늘, 이 상황이 되도록 변한 것은 없었다. 여전히 사유네의 소식은 돌아오지 않았고 카츠라는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오히려 더 심각하고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해결사 사무소를 찾아온 그가 있었다.

결국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던 긴토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헤집어두었다.

 

-. 뭐 알겠다, 알겠어. 같이 찾아봐 줄 테니까. 나도 좀 걱정되기도 하고.”

그게 정말인가, 긴토키?”

속고만 살았냐. 이래 보여도 해결사 경력이 꽤 된다고. 어이, 신파치! 가서 종이랑 붓 좀 가져와라.”

종이랑 붓은 어디에 쓰려는 건가? 사유네에게 연통을 보내려는 것이라면 나도 이미.”

하여튼. 이래서 즈라 네가 여태껏 실패한 거 아니냐. 원래 실종되면 제일 먼저 전단지부터 만들어야 하는 법이라고.”

즈라가 아니라 카츠라다.”

 

그렇게 신파치가 가져온 종이 한 묶음과 붓으로 각자 실종 전단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복사기가 없으니까 각각 만들어서 여러 장을 붙여야 한다는 긴토키의 주장이 이어져 모두가 붓을 들긴 했으나, 어쩌면 당연하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광고 전단지 뒷장에 커다란 의미불명의 그림과 반짝이는 스티커를 남발해 전단지를 만든 카구라와, 빽빽하게 해결사의 경력과 노래 가사로만 가득 찬 줄글 전단지를 만든 긴토키 때문이었다. 그나마 엘리자베스의 전단지가 제일 그럴듯하게 완성되었으나, 서로 어떤 전단지가 더 낫느냐 투닥대다가 종이의 절반을 불태우며 함께 재가 되어 사라졌다.

결국 온점으로 가득한 팻말을 다섯 개 연속으로 보고 나서야 견본으로 대표될 전단지는 함께 만들자는 평화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좋아. 이제 진짜 시작해보자고.”

 

한쪽 턱에 보랏빛 멍을 달고서 긴토키가 비장하게 붓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큰 글씨로 종이 맨 위쪽에 사람을 찾습니다.’라고 적은 후, 아래에 이름. 사유네.’라고 비슷하게 큰 글씨로 적었다. 그리고 다시 아래쪽으로 향한 붓이 잠시 멈춘다. 몇 초를 지나 몇 분이 되어갈 때까지. 갑자기 무거운 정적이 이어지고 모두가 입을 다문 채 빈 종이와 긴토키만 바라보고 있을 무렵, 굳어있던 긴토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이다음엔 뭘 써야 하는 거냐?”

이보쇼!!”

아니아니아니, 진짜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아니, 나름 오래 알고 지낸 지인 아니에요? 그걸 모르면 어떡하냐고!!”

 

신파치의 외침에 긴토키가 펄쩍 뛰듯 들었던 붓을 내려놓았다. 나름 억울한 표정이었다.

 

아니, 긴 상이 나름 쓰면서 생각이란 걸 해봤거든? 그런데 애초부터 나이도 모르고 고향도 저기 북쪽인 것만 알고…… 그리고 또 아는 건, , 술을 좋아한다?”

 

자신이 사유네에 대해 아는 것을 최대한 열심히 늘어놓다가 차마 한 손가락도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긴토키가, 다급히 옆에 앉아있는 카츠라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야야, 즈라. 너는 뭐 알고 있는 거 없냐?”

즈라가 아니라. ……그래도 추측되는 건 있네.”

, 뭔데?”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하던 카츠라가 진지한 얼굴로 해결사 일행을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카츠라의 입이 열릴 때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소파 뒤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 사다하루! TV 리모콘을 깨물면 안 된다고 했잖아!”

“- 이어서 방금 들어온 특보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와작, 하는 소리와 TV의 전원이 켜지는 단순한 기계음이 금세 소란스러워진 사무소 안을 울린다. 그리고 동시에 전해지는 뉴스 아나운서의 명랑한 목소리. 뭔가를 잘못 깨물었는지 TV의 볼륨은 벌써 몇 칸이나 올라가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TV로 쏠린 그 순간, 붉고 큰 글씨로 명확한 사실을 전하는 자막이 화면에 떠올랐다.

히토츠바시 노부노부의 결혼’.

조금 놀랄만한 소식이기는 했지만 별다른 감흥은 주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아나운서가 마저 전하는 경쾌한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상대는 홋카이도의 살아있는 신! 북부의 신이라고 불리는 시라카베 사유네 님입니다!”

 

특별취재로 사유네 님의 거처를 찾아가 영상을 찍을 수 있었다며 알리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커다랗게 사무소 안을 울렸으나 그뿐. 누구도 방금 들은 문장을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 않았다. 모두가 서로를 돌아보며 의문을 표하기도 전, 조금 흔들리던 카메라가 가마에서 내리는 누군가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흘러내리는 눈처럼 새하얀 베일을 쓴 여인. 덕분에 얼굴이 가려져 상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이, 순간 바람이 불어와 화면 속 여인의 베일을 날려보냈다. 동시에 베일처럼 새하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의 얼굴이 카메라를 향해 그대로 드러난다. 새벽이 담긴 푸른 눈과 새하얀 피부, 마치 설원(雪原)의 현신과도 같은 사람. 카츠라가 찾던 바로 그 사유네였다.

 

…….”

…….”

 

놀랍도록 적절한 타이밍에 TV의 전원이 꺼졌다. 그리고 소름 끼칠 정도로 무거운 정적이 이어진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결혼, 결혼이라니…….”

 

망연자실, 이라는 단어를 목소리로 표현하면 이런 느낌일까. 머릿속을 구성하는 부품이 한 무더기 망가져 버린 사람처럼 카츠라가 넋 나간 표정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폭탄, 부도덕한, 테러와 같은 단어가 가끔씩 섞여서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리 좋지 않은 말이라는 것은 확실했으나,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정신머리를 가진 사람은 이미 이곳에 없었다. 무거운 침묵과 충격의 중얼거림이 끔찍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풍경.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정적은 의외로 예상치 못한 이유로 인해 깨졌다. 느닷없이 초인종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띵동.

 

물론 첫 번째 초인종 소리는 충격에 빠진 그 누구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띵동, 띵동띵동, 띠딩띵동, 소리에 이어 연달아 초인종이 울리자 결국 참다못한 신파치가 현관으로 향했다. 어차피 어떤 볼일이든 제대로 해결할만한 사람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으니 양해를 구하고 손님을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죄송하지만, 이라는 말로 첫마디를 떼며 문을 연 신파치는 자신의 시선 아래에서 빙긋 웃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마주쳤다. 신파치가 낯선 얼굴에 몇 번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상대 쪽에서 먼저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사카타 긴토키 님이 있는 곳인가요?”

, ! 그렇긴 하지만혹시 볼 일이 있으신 거라면, 내일 다시 찾아와주시겠어요?”

 

신파치는 죄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말에서 긴토키가 이곳에 있다.’라는 사실만 받아들인 것인지,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파치를 지나 당당히 현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놀란 신파치가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할머니는 짧은 복도를 지나 여전히 모두가 충격에 빠져있는 공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할머니는 굳어있는 카츠라를 바라보곤 자연스레 그 옆에 앉아 긴토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사카타 긴토키 님, 의뢰를 하러 왔습니다.”

…….”

, 제거…….”

 

결국 뒤따라 들어온 신파치가 아까와 똑같은 주변 상황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답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히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따라나온 말은 이제 당연해진 사과표현이었다.

 

, 죄송해요. 다들 방금 막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터라 의뢰를 받기 힘들.”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굉음이 울려퍼졌다. 경악을 담은 신파치의 얼굴 너머로 자그마한 먼지 구름이 일어나고, 부서진 탁자에서 서서히 손을 떼어내는 할머니의 모습이 모두의 시야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절반으로 쪼개진 탁자와 가볍게 한 손을 터는 할머니. 놀란 여러 쌍의 눈동자가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그 시선의 집중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바였다는 듯, 할머니는 다시 자세를 정돈하고 짧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 , 누구.”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도 될까요?”

…… . 얼마든지 하십시오.”

 

묘한 식은땀을 한줄기 흘린 긴토키가 겨우 답을 잇고 주변 사람들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하게 굳은 해결사 일행과 달리 할머니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바로 앞에서 부서진 채 남아있는 탁자였던것의 잔해가 아니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착각했을 만큼.

이윽고 할머니의 입이 열렸다.

 

저는 시라카베 사유네 님을 모시는 히무로(氷室)라고 합니다. 사유네 님의 이야기로 이곳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 사유네 씨의?”

 

안그래도 사유네의 소식을 알려다 이 상황이 되었던 탓에 호기심과 걱정어린 신파치의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히무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유네 님은 여러분께서 사유네 님에 대해서 잘 모를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자신에 대해 알린 것이 많이 없으시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설명을 드리고자 하였지만어쩌면 카츠라 님께선 조금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히무로의 시선이 천천히, 하지만 올곧게 카츠라에게로 향했다. 마치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그가 여기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처럼.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나도 그저 몇 가지 추측만 있을 뿐이네. 사유네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부 하는 편은 아니지만, 하는 행동에서 보이는 것이 있지 않나.”

 

이제는 카츠라가 짧게 헛기침을 할 차례였다. 그는 하나하나 짚어가듯 자기가 추측한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말하는 태도나 몸가짐에서부터 드러나는 태생적 고귀함은, 그녀가 가졌을 귀족 이상의 작위에서부터 나왔을 것임을. 인간의 삶을 방관하는 것처럼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언행은, 그녀가 오랜 세월을 거쳐 살아왔을 것임을. 그리고 그녀의 고향인 홋카이도에서 전해지는 전설, 북부의 살아있는 신으로 모셔지는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전부. 카츠라가 사유네와 함께 지내며, 감히 사유네를 연모하며 자연스레 얻게 된 정보들이었다.

히무로는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경청하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맞습니다. 사유네 님은 홋카이도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모셔지며, 북부의 큰 영지를 다스리고 계시는 분입니다. 또한 영지민들은 전부 사유네 님을 시라카베 님이라고 부르면서 신처럼 숭배하고 사랑하지요. 영지를 올바르게 관리하고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사유네 님은말그대로 영지의 신과 다름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게나 대단한 분이셨다니. 탄성과도 같은 목소리가 신파치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카츠라는 예상했다는 듯 꽤 담담한 반응이었다. 사유네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 그의 관심은 그보다 더 깊은 이유에 향해 있었다.

 

말한 것은 전부 이해했네. 그런데이런 이야기를 여기까지 찾아와서 하는 이유는, 혹시 사유네가 이곳에 오지 못한 것과 관련되어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이미 아신 것 같지만, 사유네 님께선 현재 혼인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지 못하셨지요.”

…….”

그리고 저, 히무로는 바로 그 혼인을 파혼시키기 위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아까 지나간 줄로만 알았던 정적이 다시 한 번 사무소 안에 내려앉았다. 사유네의 결혼 소식이 모두에게 작지 않은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방금 이곳에 울려 퍼진 문장의 충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까지 말한 히무로는 아직 하려는 말은 끝이 아니라는 것처럼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떨리려는 목소리를 다잡듯 말을 멈추고, 흔들림 없이 정면을 응시한다. 진짜 그들에게 맡기고 싶은 의뢰의 내용은 이것이었다.

 

여러분께서 함께 도와주시겠습니까?”

 

모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번엔 오래 이어진 침묵이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성난 기세가 해결사 일행을 포함한 모두에게서 터져 나왔다.

 

전 무조건 찬성이에요!”

고맙네, 히무로 님. 바로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네!”

당연하다, ! 그 끔찍한 얼굴 반죽 같은 놈에게 우리 사유쨩을 줄 수는 없다, !”

어디로 가면 되는 건가? 지금 당장에라도 출발할 수 있네!”

…….”

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파렴치한 놈을 없. 폭탄을!”

카츠라 씨, 진정하세요!”

 

카츠라와 비슷하게 폭탄이라는 단어로 가득찬 팻말을 양손에 빼어들다가 슬쩍 엘리자베스가 팻말을 내렸다. 대신 나타난 팻말은 구호와도 같은 내용이었다.

 

사유네의 파혼을 위하여!’

사유네의 파혼을 위하여!!”

 

금세 소란스럽게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언제 충격을 받았냐는 듯 모두 기운 넘치는 얼굴이었으나,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함께 팔을 들어 올리고 있던 긴토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사유가 이런 걸 함부로 결정하거나 휘둘릴 성격은 아닌데.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런 되다 만 오징어파전 같은 놈이랑.”

아니다, . 눌어붙은 김부침개 상이다, .”

그래, 그래. 그 타고 남은 파부침개 같은 상.”

 

김부침개라니까 파부침개가 뭐냐며 달려드는 카구라와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외치는 신파치의 외침을 뒤로하고, 옆에서 듣고 있던 카츠라가 긴토키를 따라 물음을 이었다. 그에게도 남아있던 의문인 탓이었다.

 

나도 마침 궁금해하던 참이었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방에 들어온 순간 이후 한 번도 크게 흐트러짐 없는 표정을 보인 히무로였다. 심지어 저 탁자를 한 손으로 깔끔하게 절반으로 나누었을 때도. 하지만 과거를 되짚듯 감긴 히무로의 눈가 주변으로 나이 든 얼굴이 슬프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말해야 할 전말임을 알고 있었으나 다시금 그 충격을 헤집으려니 마음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히무로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표정에 남은 슬픔이 채 목소리에 전부 담기지 못했음에도 충분히 참담한 음성이었다.

 

그건사유네 님이 누구보다 영지를, 영지민들을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02. 하얀 벽 위에 핀 서리꽃

 

새벽부터 내린 서리가 하얗게 창가에 얼어붙었다. 사유네의 집무실에서 창을 열면 바로 보이는 이 자리는, 고개만 돌려도 온 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그녀가 아끼는 공간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은 오후 세 시. 차가운 햇빛이 느릿하게 방 안을 비추면, 가볍게 차를 마시며 오후의 일정을 돌아보는 시간. 사유네의 일과 중 하나가 시작되는 때였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이 시간만큼은 피어오르는 차의 향기와 온기를 느끼며 잠시 숨을 돌리곤 했는데.

 

시라카베 님, 다른 차를 새로 올리겠습니다.”

아니, 그대로 두게.”

 

고저없는 목소리. 탁자 위에는 사유네의 눈길조차 받지 못한 차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은 차였다. 평소라면 아무리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이렇게 방치하는 일은 없었을 터다. 그러나 사유네의 시선은 제 앞에 놓인 푸른 찻잔이 아니라 흐린 하늘이 자리 잡은 창밖으로 향해있었다. 간밤의 서리로 영지의 지붕 곳곳이 하얗게 얼어있는 것이 사유네의 시야에 들어온다. 북부의 추위는 험난하기만 했다. 그러니 이제 겨울을 날 준비를 다들 해야 할 텐데. 느릿하게 움직인 눈동자가 영지의 입구 쪽으로 향한다. 날씨가 맑은 편은 아니었으나, 흐릿한 햇빛 아래로 열을 지어 몰려있는 한 무리의 군사들은 보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지 못하는 군사들이 무단으로 영지를 점거하고 출입을 막기 시작한 것도 벌써 며칠째였다. 저들은 교묘하게도 영지에는 어떠한 무력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그저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차라리 영지 안으로 무력으로 밀고 들어왔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같은 방법으로 대응할 수라도 있었을 테니. 그러나 저 무뢰한들이 택한 것은 서서히 조여오는 고립이었다. 총성 없는 무언의 포위였다.

저들이 자리잡은 그날 이후 영지민 중 아무도 영지 밖을 오가지 못했다. 하필이면 겨울을 날 준비가 시급한 이 시기에, 타지와의 교류를 막은 것이다. 북부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면 노릴 수 없었을 비겁한 술책. 다행히 아직까지 영지민들 중 직접적으로 다친 사람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당장 다가올 겨울부터가 문제였다. 모두가 북부의 혹독한 겨울을 알았다. 사유네도 알았다. 이 상황을 겪는 것이 사유네 혼자였다면 어떻게든 맞서 싸웠을 것이다. 감히 이 영지에게 피해를 끼치려는 저 무도한 자들에게 그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줄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유네는 사유네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영지를 이끄는 지도자였기에, 모두를 지켜야 하는 신이자 시라카베 님이었기에. 인질로 잡혀 있는 이 영지와 영지민들을 두고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시라카베 사유네. 나와 결혼해라!’

 

탁자 위에 놓인 찻잔 위로 가벼운 파문이 일었다. 일렁이는 잔물결이, 현재의 사유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히토츠바시 노부노부. 당당한 듯 외치던 목소리는 집요할 정도로 그녀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대가 시라카베 사유네인가?’

 

영지가 포위된 지 딱 사흘째 되던 저녁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끄는 사병과 함께 성을 찾아왔다. 영지를 둘러싼 저 군사들은 전부 자신의 수하들이라며 제가 내리는 명령 하나로 이 영지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들의 요구는 단 하나. 시라카베 사유네로서 히토츠바시 노부노부와 혼인할 것.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혼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북부와 에도 간의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동맹적 결합이라 하였으나, 그의 야심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분명 이 북부를 전부 집어삼키고서도 만족하지 못하겠지. 아마 배후에도 기나긴 악연이 얽혀있을 터였다. 끔찍하게 얽히고설킨 악의의 덩어리가.

 

지금은 영지 주변을 포위하는 것에서 그쳤지만. 이다음엔 영지의 누구도 에도에 단 한 발짝 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정말로 북부의 살아있는 신이라면, 어떤 선택이 가장 도움이 될지 잘 알고 있겠지.’

…….’

그럼 조만간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겠다.’

…… 상을 치우게. 더러운 것이 묻었으니.’

!’

 

형식상의 예의를 차리듯 찻잔 두 개를 놓고 시작한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짧게 비웃음 섞인 시선으로 사유네를 내려다본 뒤 떠난 노부노부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질 때까지 단 한 번도 그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사유네. 애초에 협상과 대화라는 명목으로 이뤄진 것은 협박이었다. 혼인이라는 수단을 통해 강제로 이 북부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끔찍한 계략.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입구를 막은 영지의 군사는 그대로, 압박은 여전했다. 그 뒤로 노부노부에게서 별다른 연락이나 행동은 없었으나 사유네는 어떠한 반응도 없는 지금의 상태 자체가 무언의 압박임을 알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더 불리해지는 것은 사유네 쪽이다. 영지의 물자를 풀어 영지민들을 안심시키면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북부의 겨울은 그렇게 쉽게 대비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므로.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치우지도 못하고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시종이 결국 다시 청을 올렸다.

 

시라카베 님, 벌써 날이 찹니다. 창을 닫을까요?”

…….”

 

여전히 창밖을 향한 시선은 묵묵부답이었다. 사유네도 알고 있다. 날은 하루가 다르게 추워져 간다. 오늘은 서리였으나 다음엔 눈이 내릴지도 몰랐다. 눈이 내리면 그때는 너무 늦어버린다. 이곳은 눈이 내리면 세상이 하얗게 덮이는 도시, 함박눈이 내리면 바깥과는 다르게 오로지 홀로 고립되는 곳.

그리고 시라카베 님으로서도, 사유네로서도 아끼고 사랑하는 공간.

영지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하얀 벽은 영지를 위해서라면 제일 먼저 무너지는 것이 당연했다.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푸르게 가라앉은 두 눈동자는 여전히 창밖의 영지를 바라본 채로, 사유네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서찰을 써야겠네.”

 

뒤이은 목소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시종은 고개를 푹 내려 숙이며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 서찰에 어떠한 내용이 담길지 감히 짐작한 탓이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은 사유네이기 이전에, 이 영지를 다스리는 시라카베 님이었으니. 사유네의 명을 받은 시종이 소리 없이 문밖으로 사라지고, 탁자 위에 놓인 찻잔 너머로 누구도 듣지 못할 한숨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무거운 책임 위에 놓인 희생, 새하얗게 얼어붙은 탄식.

 

시라카베 사유네는 노부노부와의 혼인을 받아들였다.

하얀 벽이 올랐다. 북부의 추운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03. 두 명의 하늘과 한 명의 비밀

 

계절이 새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흐린 하늘 아래로 눈송이가 하늘하늘 흩날리기 시작했다. 차마 빗방울이 되지 못하고 얼어버린 작은 조각들이 소리없이 세계의 색을 지워간다. 겨울의 초입이었다. 신록이 잠들고 하얗게 물들어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계절. 카츠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는 짙은 구름으로 뒤덮인 회색빛에 닿아있었으나 그가 보고 있는 풍경은 그 너머에 있었다. 새하얀 눈송이와 파랗게 빛나는 새벽이 더없이 어울리는 사람에게.

그리고, 분명 그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사람에게.

 

*

 

안녕, 잠시 물어볼 것이 있는데. 혹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겠니?”

 

사유네를 처음 만난 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길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언젠가 옛날이야기에서 읽었던, 꽃이 사람으로 변해 생명을 얻어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느 쪽이든 제 눈 앞의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저 결 좋은 머리칼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뿐인데도 은빛 바람결이 그려진 듯했고, 새하얀 눈밭을 닮은 흰 피부는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을 담아내어 만든 것 같았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새벽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동자.

카츠라는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홀린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유의 침착한 성정은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녀를 목적지까지 안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아니, 사실 흔들림이 없었다는 말은 거짓일지도 모른다. 말투와 시선은 평소와 같았으나 묘하게 상기된 표정까진 감출 수 없었으니. 카츠라는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보았다. 현실감 없이 발만 둥 떠있는 감각. 이는 그녀의 목적지가 자신이 신세 지고 있는 서당임을 알았을 때도 계속되었다. 앞으로 같이 지내게 되었다며 스승이 사유네의 이름을 소개하는 순간에도 현실의 너머에서 어쩐지 헤어나오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사유네가 아직은 어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때마다, 함께 서책을 읽으며 미소를 지었을 때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찼음에도 여전히 아이처럼 자신을 귀애해주는 손길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친우들은 어린애 취급이라며 질색했으나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으면 전해지는 그 따듯함이 좋았다. 그래서 내심 그녀 앞에선 영원히 자신이 어리기만을 바랐다. 지금껏 자신이 봐 온 언제나 무정하고 냉정한 세계와는 다르게, 한겨울의 함박눈을 닮은 그녀는 자신이 만난 가장 다정한 계절이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변한 것은 언제였을까. 제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내리는 손길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은.

사유네가 자신의 스승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사실이었다. 처음에 사유네가 서당에 찾아온 이유도 스승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그때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바라기도 했던 것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서로 행복해지는 모습을 싫어할 리가 없었으므로. 그러나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그리고 같이 지내며 사유네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갈수록. 무언가 가슴 한편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것 같은 감각에 손끝이 저렸다.

언젠가부터 카츠라에게 정처 없이 밤중에 처소 주변을 빙글 맴도는 습관이 생긴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그녀를 떠올리면 잠들 수 없는 날이 늘었다. 구름 사이로 피어난 달빛 아래를 거닐면서도 그녀가 남겼을 발자취에 대해 생각하며 낯설게 뛰어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는 밤. 전에 서책에서 읽었던, 누군가를 떠올리느라 밤잠을 설치는 한 사내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분명 그 사내는 자신의 병을 연모라고 말하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제가 생각하고서도 짧은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단어였다. 그럴 리가 없다. 이 감정은 감히 그런 것이 아니라, 좀 더……. 잠시 걸음을 멈췄던 카츠라가 다시 처소 주위를 초조한 발걸음으로 돌기 시작했다. 긴토키가 요즘 처소 주변에만 풀이 밟힌 자국이 많은 것 같다며 지나가듯 말을 얹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 그였다.

 

사유네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평소와 같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 긴 머리칼을 가만가만 빗질하듯 쓸어내렸을 뿐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 부드러움에서 편안함보다 긴장감이 더 느껴졌다면, 이것은 누구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

 

코타로 군은 머릿결이 좋구나.”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손길이 긴장감에 살짝 움츠러든 뒷목을 스치며 지나친다. 원래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가벼운 접촉. 그러나 긴장하고 있던 몸에는 그조차도 커다란 자극으로 다가왔다. 카츠라는 처음으로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유네에게 무슨 답을 말했더라. 어쨌든 그리 그럴듯한 변명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금세 입을 살포시 가리고 작게 웃는 사유네가 있었으니.

 

어머, 얼굴이 붉어졌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 아무것도.”

 

눈치없는 머릿속에서도 사유네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다분히 섞여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놀라는지, 그 이유를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 뒤로 비슷한 행동과 비슷한 반응으로 사유네에게 즐거움을 주는 날이 반복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마음도 깊어져 갔다.

 

카츠라에게 속으로만 삼켜야 하는 비밀이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저 그녀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려고 했을 뿐이다. 날이 좋은 탓인지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잠시 눈을 붙인 사유네의 얼굴을, 호기심에 살짝 바라보려고 한 것이 이유의 전부였다. 길게 내린 속눈썹 위로 곧게 감겨진 눈, 투명하게 비치는 듯한 새하얀 피부. 그리고 설산 위에 피어난 꽃처럼 단아하게 물든 붉은 입술까지. 처음 그녀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각이 심장 속을 서서히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아름다움. 손대면 그 순간 녹아내릴 것 같은 첫눈의 결정을 닮은 것. 이마 위로 살짝 흐트러진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소리도 내지 않고 미끄러져 내린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부드럽게 풀린 표정과, 가라앉았다가 부푸는 숨소리가 고요하기만 했다.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뿐인데도 마치 숨겨진 성역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듯한 감각이 자꾸만 손끝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언제나 손끝에 녹아버릴 것을 알면서도 눈송이를 손안에 담아보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 아니던가. 그것은 호기심이라 이름 붙여진 충동이었다.

 

카츠라는 사유네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도망쳤다.

 

숨을 내쉴 수 있었던 것은 조금 떨어진 얕은 숲에 이르러서였다. 잔뜩 붉어진 얼굴을 감싸고 나무 뒤에 제 모습을 감추고서, 카츠라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저 잠시, 아주 잠시. 유일하게 색조를 가지고 있는 붉은 입술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인데. 기필코 몰래 입술을 맞춰봐야겠다는 파렴치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한 일은, 자고있는 그녀의 입술을 도둑처럼 훔친 것이었다. 분명 발끝부터 치미는 죄악감과 미칠 듯이 뛰는 심장 소리에 명칭을 붙인다면 그것은 제 이름이 되리라. 호기심이라 포장된 질 나쁜 충동을 참았어야 했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던 목소리를 눌러냈어야 했다.

그러나 정말이지 모순적이게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이 비밀을 만들고 나서야 카츠라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을 때도 확신하지 못했던 마음의 진실을. 그저 호감과 애정이 제멋대로 뒤섞여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도망치고 나서야 진실과 올바르게 마주한 이 바보 같은 상황을 무엇이라고 정의해야할까. 자신이 품은 감정은 그런 애매모호하게 정리되지 못한 마음이 아니었다. 감히 확신할 수 없었던 연모였다. 애써 부정해왔던 낙인 같은 문장.

 

카츠라는 사유네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서야 자각한 마음이 한차례 심장에 울려 퍼졌다. 카츠라가 사유네를 연모한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목소리는 온 머릿속을 휩쓸 듯 끊임없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열에 달뜬 심장이 머리와 위치를 바꾼 게 아닐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가쁘다. 처음으로 알아차린 사랑은 지나칠정도로 자극이 강했다. 그리고, 동시에 눈물이 날 것 같이 가슴이 아파왔다. 사유네는 쇼요를 사랑한다. 얼마 전까지 괜찮다고만 여겼던 문장이었다. 그러나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자 카츠라는 입술을 꾹 깨물어 꼴사나운 소리를 참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유네는 카츠라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유네는 스승을 연모하고 있다. 카츠라는 명석했고 충분한 이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세상에서 사람의 생각대로 가장 움직이기 어려운 것이 마음임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론을 내렸다. 사유네에게 이 감정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잘 감춰낼 것. 아예 포기하면 편하겠지만, 보답 받지 못하는 마음이라고 해도 처음으로 피워낸 사랑을 묻어버릴 수 없었다. 아직도 크게 두근대는 심장소리는 방금 자각한 감정이 사랑임을 알리고 있는데. 연모를 자각한 순간부터 그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숨기고 누르는 것을 먼저 배워야 했다. 한숨과도 같은 호흡을 길게 내쉬어 겨우 숨을 진정시켰을 때, 그의 얼굴에 떠오른 침착에는 결연함까지 어려있었다.

이 날 카츠라에겐 두 가지 비밀이 생겼다. 누구에게도 차마 밝히지 못할.

 

*

 

그러나,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 비밀은 카츠라 자신의 입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그의 충동을 이기지 못한 두 번째 밤.

 

사람의 마음이란 어떻게 이리도 간사할 수 있는지. 분명 그녀에게 받는 애정과 다정이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여겨진 때가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움과 강함에 매료되어 마냥 어린 아이로 보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연모임을 알아챘어도, 그리고 그 감정을 평생 숨기고 살아야 한대도. 그러나, 누군가 사람의 마음을 수면에 비유했던가. 밖에서 바라볼 땐 마치 거울처럼 동요 없이 가라앉아 보이지만, 발밑에서 찰랑이는 잔잔한 물결에 한번 손을 대고 나면 파문이 퍼져가듯 울림을 걷잡을 수 없다. 한번 피어난 일렁임은 이윽고 모여 너울이 되고 파도가 되어 온 마음을 흔들어두는 것이다.

그리고 기어이 그 끝에 잠시 발을 들인 이후에는, 마침내.

손을 내어 뻗을 새도 없이 완전히 머리끝까지 잠겨버리고 만다.

 

 

04. 한 명의 사랑과 두 명의 하늘

 

달이 아름다웠다. 푸른 밤에 하얗게 보름달이 떠오른 밤. 풀벌레 울음이 잔잔한 밤 공기에 섞여 어딘가 서글픈 온도를 머금고 있었다. 이런 밤에는 누구든 달을 벗 삼아 마음을 덜어내고 싶어지는 법이다. 더욱이 오늘, 이뤄지지 않을 사랑을 스스로 거둬내는 선택을 한 사람이라면.

이 날은, 사유네가 자신의 스승의 제자가 되기를 선택한 날이었다.

 

…….”

 

달이 가장 잘 보이는 너른 툇마루 위에 홀로 길게 달그림자가 늘어진다. 보이는 것은 하얗게 가라앉은 뒷모습뿐이었으나 카츠라는 이미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사유네다. 하얀 달 아래의 하얀 술병과, 하얗게 빛나는 여인. 언제나 반짝이며 빛나던 모습이 오늘따라 처연한 달빛에 잠겨있는 듯했다. 느릿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마른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쓸쓸한 분위기를 더한다. 무슨 마음으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까. 차마 물을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쩌면 이대로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못 본 척 지나치는 것이 옳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약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날이 있지 않던가. 강하고 완벽한 사람이라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뤄질 수 없는 마음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자국을 남긴다는 것을, 카츠라는 지난 세월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그냥 둘 수 없는 이유는, 오늘 같은 밤에 혼자 시간을 지새운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아버린 탓이다. 혹시나 흔적이 짙게 남은 마음 위로 부서진 달빛이 새어들어 상처를 남길까 염려한 탓이다. 자신이 연모하는 사람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에게 같을 것이기에.

 

이젠 밤이 꽤 차네.”

 

카츠라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하얀 어깨 위로 도톰한 겉옷을 얹어두었다. 스치듯 닿은 어깨 옆 옷자락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얼마나 이곳에 홀로 앉아있던 것인지. 곧 작은 헛기침과 발밑의 나무판자가 삐걱대는 소리가 곁을 울린다. 외롭게 비치던 달그림자의 수는 이제 둘이 되었다. 먼저 위로의 말을 꺼내야 할까, 아니면 분위기를 풀 농담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막상 옆에 앉은 후에도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까지는 꽤나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곁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카츠라는 앞선 생각이 전부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슬퍼하고 있을 것이란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실연의 아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원래부터 카츠라가 그곳에 함께 앉아있었던 것처럼, 사유네는 한 손에 감싼 잔을 가볍게 바라보다가 그를 향해 느릿하게 웃었다.

 

코타로 군, 난 제자를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어.”

 

사유네는 묻지 않은 자신의 물음에 그렇게 답했다. 오랫동안 그를 연모했으나 마지막 선택에선 스스로 제자로 남기를 선택했다고. 오히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알려준 상대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분명 아무런 질문도 먼저 꺼내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미련 없다는 듯 환하게 짓는 미소. 사랑하는 마음을 접어두게 되었음에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웃음은 처연함과 쓸쓸함이 아니었다. 흘러내리는 달빛보다 밝게 빛나는 맑음과 반짝임이었다.

자신이 연모하는 사람은 언제나 당당하고 강한 여인이었음을 잠시 잊었다. 누구보다 다정하고 아름다운 사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 그럼, 나로는 안되는 건가?”

 

그래서였다. 카츠라가 결국 이 문장을 말해버린 이유는. 달처럼 빛나는 미소에 홀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그대의 옆에 서는 것에, 나로서는 부족한 건가?”

 

여태껏 꾹 참고 눌러온 진심이 감정에 섞여 터져 나온다. 이런 걸 말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평생 감춰둘 작정이었는데. 그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함께 잔을 부딪치며 달빛에 잠긴 밤을 지새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은 마치 그날 밤의 호기심과도 같았다. 저지르자마자 후회하면서도, 동시에 애써 감춰왔던 진실을 깨닫는다는 점에서.

 

카츠라는 사유네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유네는.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사유네는 놀란 기색 없이 조용하게 카츠라의 두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었다. 잔잔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머무른다. 그 푸른 눈에 담겨있는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카츠라는 이미 모든 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내려놓은 술잔 위로 하나의 수면이 파문을 일으키며 출렁이기 시작했다. 일렁임은 곧 흔들림이 된다.

 

사유네는, 카츠라를 사랑하지 않는다.

 

흠뻑 물속에 잠겨있던 몸뚱이가 현실로 내쳐지는 기분이었다. 카츠라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 속에선 호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아차린 아이처럼 속이 꽉 막혀온다. 옆에서 들려온 사유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계속 숨을 쉬지 못했을 정도로.

 

코타로 군.”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혹은 조심스레 상처를 토닥이듯이. 이 순간마저도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하게 들려왔다. 오로지 순수한 애정만을 담고 있는 다정함.

 

달이 언제 차고 기우는지 알고 있니?”

 

사유네의 하얀 손끝이 별들 사이를 잇는 것처럼 천천히 하늘을 가리켰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둥근 달에 닿으며 멈춘 손길은 마치 그 너머의 시간을 쓰다듬고 있는 듯했다.

 

특별한 날이 오는 것이 아니어도, 그저 시간이 흐르면 달은 저절로 제 모습을 바꾸지.”

…….”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아. 지금은 저렇게 가득 찬 보름달처럼 보여도, 언젠간 기울어 스러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않니.”

 

그러니 지금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감정도, 연모에 가슴 졸이며 소중히 애태우던 밤도. 결국은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잊힐 마음이라고. 느릿하게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머나먼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면 그건 자신의 착각일까. 거절을 에둘러 표현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그녀의 곁에 설 수 없다. 그녀에게 제 마음은 풋내나는 첫사랑의 치기 정도로나 비춰질 터였다. 살아온 날도, 걸어온 길도, 그녀에 비해선 이렇게나 다르고 어렸으니.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언젠가 나보다 연모하는 여인이 생길 거란다.”

 

지나친 다정함이 아프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다양한 사람과 시간을 겪고 나면 정말로 그녀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걸까. 그게 진실인 걸까. 지금까지 사유네의 말을 의심해본 적은 없었으나, 이번은 그대로 믿기가 힘들었다. 수많은 밤을 지나며 모습을 바꾸고 달이 이지러지더라도 그것이 달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짙은 구름에 가려지더라도 달은 언제나 밤하늘의 그 자리에 떠있지 않던가. 그렇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을 겪고 난 후에도 이 마음이 그대로라면. 그때는 다시 기회를 줄 수 있겠는가?”

 

사유네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조금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분명한 거절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놓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사유네의 목소리가 조용한 밤을 울린다.

 

그때가 온다면기회는 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려진 뒷말이 무슨 내용일지 알고 있다. 아마도 자신의 고백을 받아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뜻이겠지. 카츠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코타로 군, 미안해.”

 

짧은 한마디에도 심장 한쪽이 아프도록 저려온다. 시린 색의 눈동자가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처가 될 것을 안다고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마음이 거절당하고, 또 누군가는 마음을 삼켜야 했던 밤. 털어놓은 진실과 고백도 내일엔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이 되어 돌아갈 것이다. 카츠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유네와 사유네를 사랑하는 카츠라로서.

그러나 아무리 밤이 깊어도 달은 떠오른다. 원래는 혼자서만 영원히 묻어두려 했던 감정이었다. 이제야 기회를 얻었다. 아무리 적은 가능성의 기회라고 해도, 카츠라가 사유네를 사랑하는 한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을. 카츠라는 여전히 사유네를 사랑하고 있었다. 차마 눈물이 되지 못한 아픔이 달빛에 섞여 사라지고 조용한 풀벌레 울음만이 깊어간다. 하얀 보름달이 푸른 밤에 비추던, 그런 밤이 있었다.

달이 아름다웠다.

 

***

 

창밖을 향해 내어 뻗은 사유네의 손가락 너머로 어느새 흐린 달이 걸렸다. 구름이 짙다. 분분히 흩날리던 눈송이가 점차 굵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보아도 금방 그칠 눈은 아니다. 아마 이 정도면 이 북부를 넘어서 온 나라에 눈이 내리고 있지 않을까. 영지의 지붕과 거리를 덮고, 높은 산을 지나 다른 마을까지도.

천천히 올려다본 하늘엔 보름달이 조금씩 구름에 가려지고 있었다. 하얀색으로 물들어가는 영지 위로 짙은 어둠이 가라앉는 밤이다. 마지막으로 맑은 보름달을 보고 싶었는데. 하염없이 밤하늘을 헤아려보아도 무심한 어둠만이 세상 위를 가릴 뿐이었다. 차가운 창틀 너머로 보이는 영지의 풍경이 마치 자그마한 사각형 공간 안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둠과 추위에 잠긴 이곳의 일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안다고 해도, 이제 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일, 사유네는 노부노부와 혼인한다. 달조차 흐린 하늘 아래에 길게 내려앉는 숨. 오늘은 새벽이 길겠구나. 홀로 지새우는 어둠은 시리도록 차갑기만 했다.

 

 

05. 결혼식을 하기 전 꼭 해봐야 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파혼이고 나머지는 뭐였더라.

 

새벽부터 내린 눈은 온 영지를 하얗게 두르고도 그치지 않았다.

함박눈이 내리면 날은 오히려 포근해진다던데. 소매 사이로 하얀 손끝이 창틀 위에 소복이 쌓인 눈꽃 더미를 매만졌다. 매섭게 뺨을 두드리는 바람이 차갑다. 닿음과 동시에 녹아내리면서도 마주한 감각은 시리기만 했다. 어쩌면 이 추위가 오늘의 결혼식과 제일 잘 어울리는 날씨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다는 듯 쏟아지는 함박눈과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할 한겨울의 새신부. 사유네의 시선이 천천히 벽에 걸린 거울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혼인 예식이 이뤄질 장소로 떠나기 전, 사람들을 전부 물린 탓에 거울 안에 비친 넓은 방은 텅 비어있었다. 싸늘한 정적과 흐린 어둠에 잠긴 공간. 고운 흰 빛으로 짜여진 드레스와 베일, 그 너머의 하얀 손가락이 매끄러운 표면에 닿았다. 새벽의 눈송이와 푸른 별을 물감으로 만들어 한 폭의 그림으로 빚어내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얀색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이 파랗게 젖은 눈동자로 사유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함과 청초함 사이에 숨겨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을 하고서.

 

시라카베 님, 이제는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닫혀있던 문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정적을 깬다. 마지막으로 남겨둔 시간도 이제 끝인 모양이었다. 이제는 사유네가 아닌 시라카베 님이 되어야 할 시간. 사유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해치는 일이라고 해도, 지금의 이 두 손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 있었다.

 

지금 가겠네.”

 

사유네의 느릿한 발걸음이 문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밖에서 부산스러운 인기척과 움직임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나 그저 급한 준비로 바쁜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하다며 최대한 결혼식의 시간을 늦춘 것도 자신이었으니 조급해진 사용인들이 빠르게 움직일 법했다. 그래서 짧은 시간 안에 다시 재촉이 이어졌어도 사유네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조금 위화감은 느꼈어도.

 

지금 나오지 않으시면 진짜 늦을지도 모릅니다, 사유네 님. 빨리 나오세요.”

 

사용인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동시에 소란스러운 바깥도 조용해진다. 다른 곳으로 모두 이동이라도 한 것인지. 문을 열기 직전 사유네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사용인의 말투도, 묘하게 어색하면서 가벼운 느낌이었다. 사용인이라기보다는 자주 들어본 주변인의 음색 같은.

그래, 예를 들면 마치긴토키 군의 목소리라던가.

 

여기까지 떠올린 사유네가 스스로를 향해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줄곧 잠을 설친 탓에 결국 환청까지 듣는 게 분명했다. 그저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일 뿐일 텐데. 이곳은 북부다. 눈이 가득 쌓이면 하얗게 고립되는 영지. 반대로 그들은 에도에 있다. 아마 자신이 결혼했다는 소식이 닿더라도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만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그리고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는, 많은 것이 늦어 돌이킬 수 없을 터였다.

 

바보 같구나.’

 

그래도 마지막까지 누군가 찾아와주길 내심 기대했던 것일까. 하필이면 지금 이러한 착각이라니. 그러나 이제 와서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 사유네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앞에 나란히 서 있는 세 사람의 인영을 보았다. 사용인의 옷을 입고서 당당하게 서 있는 익숙한 얼굴과 주변에 이리저리 쓰러져있는 사람들을.

 

, 더 늦었으면 다 같이 잡혀갈 뻔했어, 사유네 님.”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긴토키와, 해맑게 손을 흔들고 있는 카구라. 오랜만이라며 안부인사를 건네는 신파치까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눈앞에 일어나고 있었다.

 

긴토키 군? 지금 무슨.”

일단은 상황설명보다도.”

 

놀라움과 당혹감에 사유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떻게 그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무엇을 알고 여기에 온 것인지. 의문이 한가득이었으나 해결사 일행은 사유네가 순순히 당혹감을 해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긴토키가 사유네를 안아 든 것이다. 정확히는 번쩍 집어 들어 짐이라도 메어두듯 어깨에 얹은 것이었지만. 사유네가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고 나서야 일행은 달리기 시작했다. 수상쩍은 가짜 사용인 삼인방과 짐처럼 매달린 새신부. 행색과 조합의 괴상함에 소란스러움은 덤이었다.

 

사유네 씨,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 이상한 양파조림 같은 놈이 뭔가 이상한 짓이라도 한 건 아니냐, !”

도망치는 와중에 시끄러워! 이러다 놈들이라도 몰려오면!”

 

긴토키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일행이 달리는 복도 끝에서부터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귀신 같이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긴쨩 탓이다, .”

긴상 탓이네요.”

내 탓인거냐!!”

 

사유네를 메치듯 안고 뛰면서도 평소처럼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에 당혹감만 가득하던 사유네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이토록 생생한 것을 보니 환각이나 꿈은 아니겠구나. 안도감과 동시에 드는 감정은, 고마움과 미안함. 물어볼 것이 많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쥐었을 때 긴토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에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퉁명스럽게 들려도 걱정을 잔뜩 담고 있는 말.

 

하여튼 사유 넌 다른 사람한테 의지를 안 해서 문제야. 혼자서 그렇게 다 끌어안고 있으면 일이 저절로 해결되기라도 한대냐? 덕분에 여기까지 힘들게 도우러 왔잖아.”

 

바로 등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성의 꼭대기까지 올라왔으나 반대편에서부터 몰려든 사람들이 한가득 계단을 막고 있었다. 긴토키는 옥상에 도착해 걸음을 멈추면서도 여상한 표정으로 힐끔 사유네와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곤 씩 입꼬리를 올렸다.

 

겉보기에는 못 미더워 보일지 몰라도 말이야. 일단은 믿어봐.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여기까지 온 건 아니거든.”

 

여전히 태도는 껄렁하고 경박했으나 그 안에 품은 의미마저 퇴색되진 않았다. 이제는 사유네 혼자가 아닌 우리가 함께 있다고. ‘우리가 그녀를 도우러 왔다고. 그 마음은 온전히 사유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긴토키 군. 나는.”

저놈들을 붙잡아라!”

 

이어지는 말을 막듯이 사방에서 칼을 빼어드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노부노부의 부하들이 틀림없었다. 많은 수로 몰려들며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탓에 카구라와 신파치도 무기를 꺼내 들었지만 이미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어디든 피할 공간이 없다고 생각한 찰나, 긴토키가 사유네를 고쳐 안았다. 마주한 얼굴에 의아함을 담기도 전에 씨익 불길한 웃음을 짓는 그가 있었다.

 

, 아무튼. 세세하게 상황 설명하긴 복잡하니까.”

……?”

나머지 얘기는 즈라한테 들으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긴토키가 사유네를 안고 있던 그대로 난간 밖을 향해 던졌다.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었다. 뺨과 옷깃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허공을 가른다. 사유네가 성 꼭대기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얹었던 베일과 장신구는 떨어지는 기세에 날아가 버리고, 펄럭이는 하얀색 옷자락 너머로 긴토키의 웃는 얼굴이 빠르게 사라져간다. 조금 전 잠시나마 감동받았던 마음을 원상태로 돌려놓겠다는 것처럼. 누가 봐도 히죽 웃는 심술궂은 표정이었다.

 

긴토키! , 이 몰상식한!’

 

차마 외침이 되지 못한 목소리가 입안에서 맴돌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순간적으로 사유네는 누군가의 품에 와락 안겨졌다. 분명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었음에도 안정적으로 그녀를 품에 안고 받아드는 사내. 살짝 뜬 시야 너머로 결 좋은 흑색의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맞추어 흔들렸다.

 

미안하네, 감시를 따돌리느라. 그래도 늦지 않아서 다행일세.”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침착한 목소리와 단단하게 그녀를 안아든 팔. 카츠라다. 아직 주변에 사람이 많았기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빠르게 이동하면서도, 사유네를 안은 손은 따뜻하기만 했다.

 

코타로 군?”

 

정말 모두가 함께 와주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사유네의 놀란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아까 긴토키와 해결사 일행을 보고 놀란 이유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라면, 이번에 사유네가 놀란 이유는 한층 달라 보이는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분명 항상 어린아이로만 보이던 카츠라였는데. 조그마한 손길에도 기뻐하고 웃어주던 얼굴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 제 눈 앞에 있는 그의 표정에는, 그날의 아이가 아니라 어느새 커버린 사내가 담겨있었다.

 

우선은 따라오는 자들이 많으니 여길 벗어나는 편이 좋을 것 같네.”

 

풀숲을 헤치고 무성한 덤불을 빠르게 빠져나가면서, 카츠라는 간단히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사유네의 연락이 끊겨 걱정했던 일들과 TV로 결혼 소식을 전해 듣게 된 것. 그리고 히무로가 알려준 사유네의 상황과 앞으로의 계획까지도. 그러나 카츠라가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내가 미덥지 못한 구석이 많은 것은 알고 있네. 그리고 나를 여전히 어린아이로 보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날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고 나는 이제 어리지 않네.”

 

담담히 말하는 목소리는 더 이상 언젠가의 그날처럼 떨고 있지 않았다. 그저 당당하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뿐.

 

누군가를, 무언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은 모두에게 똑같아. 더 이상 혼자 짊어지지 말고, 어렵고 힘들 때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의지하고 고민해 주게.”

…….”

그대가 지키고자 하는 이곳의 영지민들도 함께 싸우고 있네. 연합을 만들어 이 부당함에 맞서고 있지. 덕분에 우리도 큰 도움을 받았고. 그러니…….”

 

품에 맞닿은 온기, 나지막하게 다짐하듯 울리는 음성.

 

우리가 사유네의 기댈 곳이 될 수 있도록 해주게.”

 

심장소리가 귓가를 울리듯 퍼져 나갔다. 하나의 물방울이 떨어져 이윽고 파도가 되어 물보라가 이는 것처럼. 조용하게 뛰기 시작한 고동이 가슴 속에서부터 온몸을 타고 두근대기 시작한다. 사유네는 이러한 감각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손끝에서 피어난 열기가 심장을 파고들 때까지, 이것은 호감을 넘어선 감정. 괜스레 심장 안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에 사유네가 느릿하게 그의 품으로 고개를 기댔다. 잘못 알고 있는 건 사유네 자신이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자라, 한 사람을 감싸 안을만한 성인이 되어있었는데. 카츠라는 이제 품에 안고 지켜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스스로 누군가를 지키기로 선택할 수 있는 사내였다. 언제까지나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만 알았던 영지민들이, 힘을 합쳐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처럼.

 

모두 강해졌구나.’

 

이제야 깨달은 사실이 대견하기만 했다. 지금이라면 어떤 문제도 전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심한 사유네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담긴다. 여태 가지고 있던 불안감도 전부 사라질 것처럼.

빠르게 달리던 카츠라의 걸음은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 이르러서야 서서히 느려졌다. 카츠라는 한 번 더 주위를 살피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사유네를 내려주었다. 여태까지의 소란에 장식해둔 머리며 구김 하나 없던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잠시 그런 사유네를 바라보던 카츠라가 사유네의 앞에 살짝 몸을 숙여 앉았다. 잠깐 실례하겠네. 속삭임과도 같은 목소리가 낮게 울리고, 카츠라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이마로 향했다. 손이 닿으면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져버릴 서리꽃을 마주한 듯이. 섬세하고 다정한 움직임이 천천히 머리칼을 넘겨주며 정리해준다. 누군가 단정히 정리해주었을 치장의 완벽함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사소한 흠결도 결혼식을 맞아 하얗고 붉게 물든 그녀의 아름다움을 해치진 못했다. 은백색으로 흩날리는 머리칼과 느릿하게 귓가를 스치는 손가락, 그리고 더 이상 차갑지 않은 함박눈. 카츠라는 제 눈앞의,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사람을 향해 미소 지었다.

 

오늘, 무척이나 아름답네.”

 

하얀 눈에 덮인 하얀 숲 사이의 두 사람을 감싸듯 높은 나무들이 자리 잡았다. 서로의 심장 소리만이 푸른 겨울의 추위를 녹이는 곳. 그곳에 카츠라와 사유네가 있었다. 차가운 한겨울의 한복판이 아닌 어느 따뜻한 봄바람을 맞이하는 것처럼. 두 사람이 온기를 맞잡고 서로를 바라본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오랜 시간이 흘러 이렇게 시선을 마주하고서야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온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함께 나눌 이야기가 더욱 많았을 텐데. 그러나 사유네가 처음으로 카츠라를 온전히 바라본 시간은 찰나와 같이 짧기만 했다. 어느새 뒤를 쫓던 적의 발자국이 지척에서 느껴진 탓이다.

부자연스러운 기척이 한때의 평화를 어그러뜨린다. 그림자처럼 손을 뻗는 적은 언제나 이런 틈을 파고드는 법이었다. 가까이 오기 전까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움직임. 숲과 주변을 조용히 둘러싸는 포위망에서 그들이 적어도 상당한 실력자임이 드러났다. 싸늘하게 식은 하얀 숲 너머의 어둠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직 모습이 보인 것은 아니었으나 사유네도 카츠라도 그들의 정체를 알았다. 천도중. 노부노부가 수족처럼 부리는, 아니, 그 노부노부를 수족으로 부린다고 하는 쪽이 더 어울릴까. 노부노부를 이끌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그들이 사유네를 다시 데려가려 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사유네와 노부노부의 결혼을 억지로라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카츠라와 사유네가 매복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들도 더 이상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하나둘 무기를 빼어들고서 나무 그늘이 만들어낸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어림잡아 열 명은 되어 보이는 숫자. 차가운 전운이 눈보라와 함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이어질 싸움을 위해 전투 자세를 취하려던 사유네를 막은 것은 카츠라였다. 그녀를 등 뒤에 둔 채로 카츠라가 천천히 칼을 빼어 상대를 겨눈다.

 

저들의 목적은 사유네일세. 그러니 먼저 도망치게.”

그렇지만.”

내가 사유네의 기댈 곳이 되도록 도와주기로 하지 않았나?”

 

사유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내뱉는 목소리에는 결연함마저 어려있었다. 이곳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함. 분명 그라면 잘해낼 수 있겠지만, 그는 한 명이고 적은 다수였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흐트러트렸다간 크게 다칠 수도 있는데. 그렇기에 함께 맞서 싸우려고 했음에도 사유네는 섣불리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홀로 짊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바로 아까 전이었다. 어린아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들에게 도움을 받기로 결심한 마음이 있었다.

 

나를 믿어주게.”

 

흔들림 없이 적을 마주하는 카츠라의 뒷모습이 커다란 의지를 담고 있는 듯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유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유네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결국 걱정이 아닌 믿음이었다.

 

…… 그럼, 잠시 뒤에 만나.”

반드시 그리하겠네.”

 

짧은 끄덕임. 그의 답을 듣자마자 사유네는 뒤돌아보지 않고 반대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망설임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카츠라와 사유네는 믿음을 주고받았다. 그것으로 사유네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고 모두가 있을 안전한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카츠라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불안마저 지울 다짐이었다.

쏟아지는 함박눈에 휩싸여 하얀 숲은 시간이 갈수록 어두워져 갔다. 달리는데 불편한 긴 치마의 옷자락을 찢어 늘어트리고,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를 벗어 던진다. 눈에 쓸리는 발자국이 사유네의 걸음마다 길게 하얀 선을 잇고 있었다. 하얀 숲 속에서 얼마나 도망쳤을까. 조금만 더 가면 이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흐린 하늘 너머로 서서히 노을진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을 때, 사유네는 달리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던 것인지, 마치 사유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길을 막고 있는 한 남자. 오보로. 색 없이 구부러진 회백발의 머리칼을 지닌, 위험한 인상의 사내였다. 갈라지듯 낮은 목소리가 눈보라 너머의 사유네로 향한다.

 

포기해라, 시라카베 사유네.”

네놈이 떠들 일이 아니다.”

발버둥 쳐봤자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영지에는 더 피해만 간다는 것을 알 텐데.”

 

메마른 상대의 눈동자가 떨어진 거리에서도 생생히 마주쳐오는 것만 같았다. 사유네의 시선이 분노로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모두를 위해 순순히 포기해라. 그 편이 모두에게 좋을 터.”

 

모두를 위한 희생과 포기. 오보로의 말은 사유네가 가장 연약하게 여기는 부분을 파고들어 왔다. 이 사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 그녀가 정말로 이 영지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이런 부당한 요구에도 저항하지 않고 맞서지 말아야 한다고. 영지의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보다 자신 혼자만 상처받고 희생하면 훨씬 적은 피해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테니까. 분명 사유네도 얼마 전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당연하게만 여겼던 생각이었다.

 

모두를 위한다라.’

 

이런 상황이 우습게도 정확히 반대의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과 똑같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숲에서, 처음으로 그 사람을 마주했던.

 

*

 

눈보라도 차마 밝은 달을 가리지 못했던 밤이었다. 마치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눈송이가 겨울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려 내렸다. 커다란 보름달이 밤하늘의 중턱에 걸렸으나 밤거리 위로 그림자를 늘이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빛이라곤 높이 떠있는 달빛이 전부인 늦은 시간이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시간이기에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여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 그리고 누군가와 마주치지 않고 홀로 생각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사람. 이런 늦은 밤중에 신이자 영주님인 사유네가 홀로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면 성이 발칵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 혹은 사유네에게 무슨 고민이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서 걱정하겠지. 그래서 사유네는 영지민들의 눈에 띄지 않고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유네가 눈이 오는 날 바람을 헤치고 때늦은 산책을 하고 있던 이유였다.

 

눈이 오는데, 잠시라도 여기에서 피하고 가는 건 어떤가요? 그대로 지나면 옷이 젖을 겁니다.”

 

깊숙한 산길을 지날 때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 아래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나뭇가지 때문인지 수북하게 눈이 쌓인 길가와는 다르게 거의 눈이 내리지 않는 공간. 그곳에 긴 갈색의 머리칼을 길게 늘인 한 남자가 있었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을 시간에 사유네를 만난 탓일까. 남자는 제 옆에 놓인 바위를 가리키며 잠시 쉬고 가기를 권했다.

성 안의 사람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몰래 나왔기 때문에 사유네의 옷차림은 이 성의 영주라는 것이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짙은 외투도 걸치고 있던 탓에 더욱. 그렇다면 정체를 들킬 걱정은 덜었으니, 사유네는 낯선 상대의 제안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일종의 호기심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굴이 익지 않은 것을 보아 영지민도 아닌 듯한데, 잠시 어울리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 역시.

 

흩날리던 눈보라가 깊은 밤을 거쳐 하늘하늘 포근한 눈송이가 될 때까지. 의외로 남자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남자는 아직 사유네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많이 알고 있었고 사유네의 이야기에도 잘 공감하고 있는 듯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자신보다 연상의 누군가와 고민을 나누고 있는 것 같은 감각. 기나긴 세월을 홀로 살아남아 지내면서 예전에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마치 진정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느껴져서.

 

가끔은 속세의 짐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한 것도 좋지 않을까요?”

 

기다란 머리칼 끝이 가볍게 흔들린다. 남자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마련해준 자리에 앉아 어느새 모여든 작은 동물들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고 있던 사유네였다. 하얗게 쌓인 눈 위로 동물들의 발자국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털을 가진 사슴과 흔히 보기 힘든 화려한 깃털의 새, 그리고 자그맣게 털을 부풀린 토끼도. 모두 사유네의 손길 곁에서 제 머리를 부비거나 작은 울음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을 위한 것?”

 

한쪽에는 겨울을 맞아 하얀 털을 가진 토끼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면서, 다른 손으로는 작은 술잔을 들고 사유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니. 그럼 지금은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일까. 사유네에게는 아직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사유네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상대를 바라보자 쇼요는 여전히 미소를 입가에 담은 채 설명을 이어갔다. 추운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다정이 배어 나온다.

 

사람은 살아가며 다양한 역할을 가지게 되죠. 딸이 되기도 하고, 사무라이가 되기도 하고, 학생이 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런 다양한 역할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챙기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답니다.”

 

느릿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온 밤을 뒤덮는 눈송이보다 더 부드럽기만 했다. 보름달이 비추는 하늘 아래에서 어느 지나간 봄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그가 하는 말을 완벽하게 납득한 것은 아니다. 곧바로 받아들이기엔 지금의 사유네로서 살아온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둘 떠나보내며 잃어버린 공허함이 너무도 깊었다.

사유네가 사유네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의 표정에서 약간의 혼란을 알아차린 쇼요의 얼굴이 작은 웃음을 담아냈다. 사유네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온화하게 가라앉은 바다와도 같았다. 같은 고민을 가진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쇼요는 사유네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을 알아가는 것도 포함이 되지요.”

…….”

사유네도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지다 보면 해방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지금은 힘들게 느껴져도, 언젠가는 꼭.”

 

보름달이 하얀 눈과 함께 부서지듯 빛난다. 눈송이가 어느새 느릿한 진눈깨비가 되어 사유네의 뺨을 두드리고 있었다. 쇼요가 사유네를 위해 들려준 이야기들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는 먼 구름 속의 이야기로만 들린다. 그러나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마음 한 쪽에 남았다. 언젠가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리면서, 밝은 달과 함께 비어가는 술잔을 채우는 밤. 그것이 쇼요와 사유네의 짧은 첫 만남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시간을 시라카베 님으로 살아오며 사유네는 영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해치는 일이라고 해도. 누군가를 이끄는 위치에 있는 자라면 항상 희생을 염두에 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무려 몇백 년의 시간이다. 사유네는 그동안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태어난 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으며, 사랑하는 가족들의 죽음도 홀로 견뎌내야 했다. 사유네에게 이제 온전히 남겨진 것은 영지와 그곳에 사는 영지민들뿐이었다. 살아있는 북부의 신, 가장 아름다운 영지의 주인. 사유네가 지키고 다스려야 하는 것.

언제부터였을까. 시라카베 님으로서의 사유네는 잘 웃지 않게 되었다. 자비롭게 미소를 짓긴 했으나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 허물없이 행복함을 드러내는 일이 줄어만 갔다. 정확히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사유네는 완벽하고 강한 시라카베 님이 되어야 했기에. 영지민들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시라카베 님일 테니, 사유네의 행복은 잠시 미뤄두는 것이 옳았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해진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사유네가 틀렸다. 사유네가 사유네가 아닌 시라카베 님으로서만 살아가는 것은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요.’

 

또다시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쇼요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낸다.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힘들었던 이야기들이 마치 빠진 조각을 맞추듯 제자리를 찾아갔다. 모두를 위하여 내가 해야하는 선택. 쇼요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올바른 답을 내어주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과 모두를 위한 것은 공존할 수 있다고. 꼭 어느 한 쪽을 희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행복은 언제나 양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것이었다.

 

시라카베 사유네. 아직도 헛된 희망을 품는 건가. ”

 

깊은 숲 속이 순식간에 어두운 노을로 젖어들어 간다. 오보로의 메마른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으나 사유네의 얼굴은 희생을 감내한 표정도, 영지를 건 협박에 굴한 표정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되고 나서야 온전히 깨닫는다.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누구의 손을 잡고 견뎌내어 왔는지. 사유네는 대답 없이 검을 고쳐 들었다. 더 이상 자신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라카베 님은 없었다.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야 했던 사유네도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시라카베 사유네. 오로지 그 이름으로 정의되는 사람. 사유네의 입가에 진정한 미소가 옅게 떠오른다.

 

쇼요 선생님, 이제야 깨달았어. 그대가 알려준 대로 영지를 다스리는 신이 아닌 사유네로서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상대에게 검을 겨눈 사유네의 한쪽 팔과 손등에 자국이 번지듯 비늘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얼굴을 비추며 그늘진 노을 그림자 너머로 색이 뒤바뀐 눈동자가 물들어 있었다. 흔들림 없는 시선. 사유네가 제 눈앞의 적을 향해 달려나갔다.

 

이제는, 망설이지 않아. ‘시라카베 님으로도, ‘사유네로도 행복해질 거야.’

 

몰아치는 눈보라가 마치 그날 밤의 보름달인 것처럼.

 

그러니더 이상 네놈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해!”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시라카베 사유네가 검을 휘둘렀다.

 

 

06. 둥그런 달 대신 동그란 빛

 

겨울의 해는 빠르게 진다. 흐리던 푸름은 붉음을 넘어 곧 어둠이 되었다. 노을이 집어삼킨 빛이 어슴푸레 가라앉기 시작하는 시간. 사유네의 걸음을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상대의 무기와 사유네의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숲을 울렸다. 먼저 공격해올 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서서히 지워져 가는 붉은빛 너머 드러난 오보로의 눈이 미묘하게 찌푸려진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군.”

이제 네놈이 대가를 치를 시간이지.”

 

팽팽하게 맞선 날붙이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흘렀다. 힘겨루기라도 하듯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면 서로의 몸을 베어낼 수 있을 정도로 매서운 기세.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시야를 흐리게 했으나 둘 중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메마른 눈동자와 색이 다른 눈동자가 서로의 적을 바라본다. 날카로운 시선이 스치듯 검신을 훑고 떨어질 무렵, 오보로가 밀어내듯 쳐낸 검에 사유네의 몸이 살짝 뒤로 움직였다. 힘의 차이까지 무너뜨릴 순 없던 탓이다. 잠시 흐트러진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단검이 빠른 속도로 사유네를 향해 파고들었다. 사유네는 스치듯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긴 했으나 옷자락이 베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다시금 비슷한 경로로 던져지는 단검을 쳐내고 사유네가 검을 휘둘렀다. 매서운 기세가 오보로의 인영을 헤치고 대신 나뭇가지를 베어낸다. 눈에 뒤덮인 숲이 가까이 있어 검을 빠르게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이어진 공격도 번번이 나무에 막혀 무위로 돌아갔다. 반격하듯 쏟아지는 단검을 받아치며 사유네가 살짝 거리를 벌렸다. 찢어진 옷자락이 눈에 젖어 불편하다. 그의 공격을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제대로 된 타격이 들어가지 않으니 체력만 줄어가고 있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검을 부딪치고, 공격을 주고받으며 싸움을 이어간다. 하얗게 쌓인 눈 위로 수많은 발자국과 상처들이 부서졌다. 처음보다 한결 흐트러진 숨소리를 흘리는 사유네와 찢어진 옷깃을 소매에 달게 된 오보로. 검을 맞부딪힐 때마다 알 수 있었다. 직접 싸우고 맞서보았기에 알아차린 사실. 그와 자신은 비슷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죽어도 죽기 힘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신체.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 존재들이 이곳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검으로 적을 베어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것은 적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사유네를 응시하는 오보로의 시선이 한결 날카로워진다. 단순히 그녀를 인질이자 거래의 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명백한 경계와 의문을 가진 눈동자로.

바람에 날리던 눈보라가 서서히 잦아들어갔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숲 속에 정적이 지독하게 자리를 잡는다. 흐린 구름에 가려 밤의 달빛은 아직이었다. 사유네가 작게 숨을 골랐을 때, 적당히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 것인지 오보로가 느릿하게 무기를 고쳐들었다. 손잡이를 돌려 칼날을 역수로 취한 자세. 한결 가라앉은 눈동자로 사유네가 결연함을 담아 검을 움켜쥐는 순간이었다.

 

-라카베 님!!”

 

어디서부턴가 커다란 프로펠러 소리가 하늘 위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묻혀 들려오는 누군가의 외침. 워낙 거리가 먼 탓에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으나, 점점 커지는 것으로 보아 여기로 가까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밤하늘 사이로 드러난 것은, 여러 명을 태우고 있는 커다란 헬리콥터. 흉흉하게만 흘러가던 둘 사이의 대치가 잠시 누그러진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헬기?”

시라카베 님!! 모시러 왔습니다-!!”

 

애초부터 사유네를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듯 사유네를 발견한 헬기 위 사람들이 양옆으로 손을 흔들어댔다. 흐린 밤에 떠오른 동그란 보름달 대신 사유네를 비추듯 내리는 새하얀 조명. 그녀를 구하러 왔다며 당당하게 외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사유네가 다스리는 이 북부의 영지민이었다.

 

구하러 왔습니다, 시라카베 님!”

북부의 살아있는 신과 억지로 결혼하려 한 노부노부의 만행.’

 

사유네 님! 그딴 놈이랑 결혼하시면 안 돼요!!”

협박 섞인 정략혼 결사반대!’

 

저희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폭탄폭탄폭탄폭탄폭탄-.’

 

각자 팻말을 들고서 소란스레 사유네의 이름을 외친다. 모두가 오지는 못했지만 모여있는 사람들의 수만으로도 이미 의지와 마음이 전해지고 있었다. 사유네가 자세한 상황을 영지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탓에 단순한 정략혼 정도로만 여겼던 영지민들도, 남아있는 잔당을 물리친 긴토키 일행 덕분에 그녀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들 힘을 모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유네를 지키겠다며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일반 영지민들이 훈련된 군사들을 무력으로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단순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엄청난 무기가 되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입을 움직이는 것. 팻말과 함께 가져온 커다란 카메라가 사유네와 주변의 상황을 찍으며 북부에서 일어나고 있던 끔찍한 일들을 생방송으로 전국에 전하기 시작했다. 노부노부와 그의 수하들에 대한 악평을 함께 늘어놓는 것은 덤이었다.

단 한자락의 어둠도 남겨놓지 않겠다는 듯 내리비추는 조명 아래에서, 오보로는 계획이 전부 어그러졌음을 알았다. 그림자는 이런 밝은 빛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귀를 찌를듯한 소란과 집중되는 이목에, 결국 오보로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을 만들어낸 저들의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맞이한 이쪽의 운이 없었다고 해야 할지. 무감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한번 둘러본 오보로가 숲의 그늘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일을 망쳐 아쉽지만.

 

다음에 보도록 하지.”

 

원래부터 그곳에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어둠과 함께 녹아든 오보로가 자취를 감췄다. 이제 남은 것은 새하얀 눈밭과 하얗게 흩날리는 머리칼을 매만지는 사유네 뿐.

사유네가 고개를 들어 헬기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차갑게 뺨을 두드린다. 여전히 조명에 비친 시야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밤하늘은 흐리고 어두워 흔하던 달빛마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보다 밝게 온 세상을 비출 것만 같은 불빛이 사유네를 감싸고 있었다. 그날의 보름달처럼 둥글게 빛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준 빛.

 

사유네의 행복이 여기에 있었다.

 

자신을 이끌어준 손을 마주보고 팔을 내어 뻗었다. 괜찮음을 알리듯 가볍게 흔드는 손과 어느 새벽별보다 환하게 반짝이는 미소. 차가운 북부의 겨울 위로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추위를 메우며 오래도록 울려퍼졌다.

 

 

07. 푸른 하늘 새벽별 하얀 벽에는 계수나무 한 나무

 

사유네의 파혼을 축하하는 연회는 여태껏 겪어온 것을 보상받듯 아주 성대하게 열렸다. 온 성이 사람들의 행복한 비명으로 몸살을 앓고도 남을 정도로.

 

시라카베 사유네의 파혼을 위하여!”

 

커다란 외침과 함께 거칠게 잔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소란스러움. 벌써 몇 번째 들려오는 구호인지 몰랐다. 한 명이 외치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술이 흘러내리는 잔을 들어 올리고서 따라 외치고,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이 말을 받으면 모두가 함께 함성을 질러댄다. 처음에는 그나마 적당히 달아오른 분위기와 기쁨이 겹쳤을 뿐 평범한 연회였는데. 가뜩이나 독한 북부의 술까지 가미되자 모두 취기를 넘어서 광기에 가까운 기행을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평소답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이, 신파치. 거기서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와서 같이 먹지 그러냐. , 뭐냐, 그렇게 삐딱하게 서 있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허리가 이렇게 딱! 절반으로 접혀버린다고. 이것 봐라. 벌써 이렇게 구깃구깃해져서. 얼라리?”

긴 상! 안경 쓴 그림한테 술 붓는 건 그만두세요!”

여기 오로나민C가 다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냐, ! 어서 가부키쵸의 여왕님께 예를 갖추지 못하겠냐, !”

헬기가 나올 때까지 계속 혼자 스탠바이하고 있었습니다.’

 

멀쩡한 사람들이 보았다면 금방이라도 기절하거나 혀를 찼을 괴상한 소란에서 자연스레 시선을 돌린 카츠라가 손에 든 잔을 천천히 내려두었다. 살짝 술이 과했나. 아무래도 휩쓸리기 전에 잠시 자리를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리고 조금은 숨을 돌릴 시간도 필요했으니. 여전히 술병을 두고 부어라 마셔라 하는 일행과 사람들을 두고서 카츠라는 아까 봐두었던 문을 통해 조용한 바깥으로 나왔다.

 

새벽을 향해가는 밤하늘이 서서히 개어가고 있었다. 아까의 흐린 구름은 지나쳐온 과거에 두고 왔다는 것처럼, 겨울바람 사이로 새하얀 달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자연스레 하늘을 올려다본 카츠라의 머리칼이 가만 흩날렸다.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 이제 영지는 다시 평화를 찾을 것이고, 사유네도 억지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두가 원한 결말이다. 하지만 정신없이 위기를 해결하고 나니 찾아온 평화와 조용함이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원래 몰아치던 눈보라가 그치면 잔잔한 정적만이 남는 것인가. 카츠라의 숨이 차가운 북부의 겨울 위로 하얀 입김이 되어 흩어질 때였다.

 

코타로 군. 여기 있었구나.”

사유네?”

 

단아한 발소리가 카츠라의 바로 뒤에서 울렸다. 약간은 놀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사유네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한결 편해진 옷차림과 한쪽으로 가볍게 내려 정리한 머리칼,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사유네는 그의 옆까지 다가와 아까의 카츠라가 그랬던 것처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른 별이 하나둘 구름을 헤치고 돋아난다. 달이 밝으면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던데. 그것도 맑은 밤하늘 아래에선 소용없는 모양이었다.

무어라 카츠라가 마저 입을 열기 전에 사유네가 빨랐다.

 

코타로 군, 오늘 정말 고마워.”

 

부드러운 목소리. 간단한 한마디였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카츠라와 일행들이 도와주었기에 사유네 자신뿐 아니라 영지까지 지켜낼 수 있었다. 모두가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었을 결과다. 그리고 그들이 아니었다면 쇼요의 말도 완벽하게 이해하는 날이 오지 않았겠지. 사유네가 느릿하게 카츠라를 돌아본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에는 사유네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사유네를 위해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일세.”

 

카츠라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을 때였다. 나지막한 사유네의 목소리가 어두운 밤을 울린다.

 

그건 친우로서의 도움이었니? 아니면, 단순히 동료의 위험을 내버려둘 수 없어서?”

 

풀벌레 울음 대신 찬 바람이 겨울을 채워간다. 사유네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은 카츠라의 시선이 좌우로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유네가 이런 말을 꺼낸 이유를 가늠이라도 해보려는 눈치였다. 물론 자신의 짝사랑과는 별개로 사유네는 카츠라의 소중한 친우이자 동료다. 어떠한 관계였어도 카츠라는 사유네를 구하러 달려갔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도 사유네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녀를 구하는 것이 더 절박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지금껏 그래 왔듯 본심을 숨겨야 하는 걸까. 말문이 막혀 어색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던 카츠라를 향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사유네가 물었다.

 

내가 코타로 군과 예전에 했던 약속, 아직 기억하고 있니?”

 

다행히 이번에는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여전히 사유네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 그 일을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많은 사람을 만나도 감정이 그대로라면 기회를 주겠다던 그 약속. 꺼내어둔 마음을 감춰둬야 했던 밤이 펼쳐지듯 눈 앞에 어린다. 그날의 손끝을 스치던 바람결마저도 아직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당연히 기억하고 있네.”

 

사유네의 시선과 카츠라의 시선이 올곧게 서로를 마주한다. 새벽을 닮은 푸른 눈동자가 반짝이며 살풋 웃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뻗어지는 손과 카츠라의 뺨에 닿는 온기. 이어지는 사유네의 말은 없었다. 대신 새하얀 겨울에 봄이 찾아온 것처럼, 혹은 때 이른 나비가 바람결에 날아든 것처럼. 그의 뺨을 감싼 사유네가 그를 당기듯 입을 맞췄다. 딱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떨어져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부드럽게 밤하늘에 젖어있었다.

 

이게 그때의 답이란다. 나도 그대와 마음이 같아.”

 

온 세상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영원히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문장을 사유네의 입에서 들은 탓인지, 아니면 거짓말처럼 닿은 입맞춤 탓인지. 그대로 굳어버린 카츠라의 양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서히 번지듯 화악 뺨마저 붉어지는 것이, 손을 대면 뜨거워 다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 그게 정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카츠라가 아까 들은 말을 이해하려는 것처럼 겨우 사유네를 바라본다. 삐걱대는 종이인형 같은 모습에 결국 웃음이 터져버린 사유네가 있었다.

 

어머, 그럼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니?”

, 아니. 절대 그런 게 아니라!”

 

그 뒤로 이어지는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와 변명하듯 어색하게 외치는 누군가의 음성. 별이 밝게 떠오른 하늘이 새벽에 이를 때까지, 다정한 남녀의 음성은 추운 겨울밤을 오래도록 따스하게 채워갔다. 보름달에 비친 영지가 하얗게 물들어 반짝이는 밤. 하얀 벽을 넘어 꿈이 피어나는 곳으로. 오랜 시간과 역경을 지나 이제야 맞이한 이야기의 끝이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결말은 단 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카츠라와 사유네가 서로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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