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여름 햇살이 새파란 하늘의 아침을 깨우는 계절. 채 여물지 못한 온도와 매미 소리가 이따금씩 푸른 잎 사이를 헤치고 그림자 너머로 새어나온다. 비론 이곳은 가부키쵸, 초여름의 싱그러움보다 짙게 물든 밤하늘과 왁자한 술 냄새가 어울리는 거리라고는 해도, 초목의 변화를 몰고 오는 이 한가한 바람마저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포근한 햇빛과 아직은 시원한 온도가 뺨을 스치고 나면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난동을 부리던 행인들도 조금쯤 분위기를 누 그러뜨린다. 그런 날이었다. 맑게 갠 하늘 아래에서 모두가 평소와 같은 활기로 하루를 살아가 는 오늘. 그러나 세상 일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곳의 한구석에도 평소의 일상을 보내지 못하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면 여기, 어느 평범한 해결사 무리라던가.
“… 어이, 신파치. 분명 언제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지 않냐?”
“… 그러게요. 그때는 탁자도 반으로 부서지고….”
“분명 데쟈뷰다, 해. 이대로 시간의 로프에 갇혀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하는 거다, 해.”
“그런데 로프가 아니라 루프 아니냐?”
“지금 거기서 딴지 걸 때에요?”
힐끔, 그리고 속닥속닥. 다시 힐끔. 평소와 다르게 소파에 나란히 앉은 해결사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러한 단어를 쓸 수 있을 터였다. 원래라면 가부키쵸의 거리에서 가장 소란스럽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왁자지껄한 소리가 문밖부터 들려왔을 텐데. 지금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정적이었다. 어색하게 굴러다니던 긴토키의 시선이 슬쩍 앞을 향한다. 맞은편의 손님용 소파 앞에는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오늘의 의뢰인이 있었다. 정확히는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한 여인이 있다고 해야 할까. 애석하게도 긴토키에게 매우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 여름날에 눈꽃을 아스라이 모아 지은 듯한 백색의 머리칼이 등 뒤로 길게 늘어져 단정하게 흔들린다. 반짝이는 새벽을 닮은 눈동자는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이런 사무실의 소파와 포근한 초여름의 햇살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겨울을 담고 있는 사람.
땀이라도 삐질 흘릴 것 같은 모습으로 긴토키의 입이 느릿하게 열린다.
“… 그래서, 그,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왔, 왔을까나? 사유.”
뭐냐, 이제 존대 써야 하는 거 아니지? 절이라던가? 괜히 고장 난 듯 이런 헛소리나 늘어놓는 긴토키를 향해, 시라카베 사유네, 살아있는 북부의 신으로 불리는 여인은 살풋 웃었다. 그녀는 새삼 긴토키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었다.
몇 달 전, 몰아치는 눈보라와 거대한 적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려고 했던 계절. 그날이 지난 이후로 이렇게 그와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뒤로 마무리해야 할 일들과 수습해야 할 사 건들이 많아 영지를 안정시키는 것에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더 벽이 쌓이기 전에 제대로 감사를 전하려 했는데. 하지만 약간의 장난을 겸해 사유네가 몰래 찾아오자마자 맞닥뜨린 것은,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제 앞으로 던져진 거대한 딸기 우유였다.
‘아니!!! 하루를 꼬박 줄 서서 기다린 특제 스페셜 로열킹딸기베리우유가-!!’
‘흔들지 마세요!! 제대로 잡으라고요, 으와악!!’
‘사다하루, 떽! 팩을 물어뜯으면 안 된다, 해!’
‘모두 잘 지내고 있었….’
철퍽,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귀가 아플 정도의 외마디 비명과 우당탕 소리가 멈 추고 나면 이어진 것은 싸늘한 정적. 그 사이로 딸기 우유가 똑똑 바닥으로 방울져 떨어지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마루 위를 울린다.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던 사유네의 하얀 옷자락 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가 부드럽게 퍼져 나가기 시작 했으나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다하루를 안고서 합, 하고 입을 다문 카구라와, 경악한 표정 그대로 굳은 신파치와, 열린 문을 향해 손을 뻗은 채로 멈춰 있는 긴토키. 그리고 딸기 우유를 옷에 맞은 채 인자하게까지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이들을 바라보는 사유네가 있 었을 뿐. 정적 너머로 들려오던 물방울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고 나서야 삐걱대는 소리를 온몸 으로 표현하며 긴토키가 고개를 들었다.
‘… 그러니까, 그 뭐냐. 서, 서프라이즈… 선물? 하하하하….’
*
여기까지가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일. 다행히 타에의 옷을 빌려 적당히 수습되긴 하였으나 그 뒤로 이어진 상태가 지금의 어색한 모습이었다. 사유네가 생각보다 더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 는 것을 느꼈다고 새삼 긴토키가 예의를 차릴만한 인물이 아니었으니, 그가 저렇게 눈치를 보 고 있는 이유는 그저 아까의 소란이 원인이 되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옷자락 에 남아있는 딸기우유 잔향이 자꾸 사소한 복수를 부추겼으므로. 사유네는 굳이 설명을 덧붙 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그냥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찾아왔던 건데. 내가 오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었던 거니? 사고 라도 있었다던가?”
“아니, 그, 없죠. 없습니다. 옙.”
느릿하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채 감추지 않은 장난기가 담긴다. 이상하네, 분명 무언가가 날 아다녔던 것 같은데. 괜히 작게 중얼거려 보면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피하는 긴토키가 보였다. 여전히 어색하게 식은땀을 흘려대는 그를 향해 사유네가 꾹 웃음을 삼켜낸다. 조금 더 놀려보고 싶지만, 슬슬 이쯤에서 본론을 꺼내두기로 할까. 여태의 소란으로 미뤄둔 의뢰의 내용을 알릴 차례였다.
“음, 사실 여기에 온 이유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의뢰를 하고 싶어서 온 거란다.”
“의뢰요? 사유네 씨와 관련된 의뢰인가요?”
“응. 아주 중요한 의뢰인데, 맡아주겠니?”
슬쩍 돌아간 신파치의 시선이 옆에 앉은 카구라와 마주친다. 아까도 말했지만 분명 비슷한 상 황이 있지 않았나? 이렇게 직접 찾아와 의뢰할 정도의 내용이라면…. 카구라도 신파치와 정확 히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옆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또 누구냐, 해! 어떤 이상한 놈이 쳐들어온 거냐, 해?! 장군이든 오징어든 전부 날려서 벽에 장식으로 걸어두겠다, 해!”
“아직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건가요?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어머. 걱정해줘서 고마워, 모두. 하지만 다행히 그 일은 잘 마무리되었단다. 지금 하려는 의뢰 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서.”
살짝 입을 가리고 웃음을 흘리는 사유네의 반응을 확인하자 긴토키의 표정이 약간은 떨떠름하 게 변했다. 뭔가 예상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것 같기도 하고. 모 두의 호기심과 미묘한 의문이 피어오를 즘이 되어서야 느릿하게 사유네의 입이 열렸다. 그야 말로 모두의 예상을 깨는 의뢰라고 할 수 있었다.
“엥, 누구 선물?”
“네에? 카츠라 씨의 생일 선물이요?”
“생일 선물로 장군을 날려보내는 거냐, 해?”
각자의 표정이 제각각으로 달라졌다. 오직 의뢰의 당사자만이 그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렇게 찾아와 중요한 의뢰로 내어 놓은 것이 누군가의 생일 선물 고민이라니. 아무리 봐도 저번의 의뢰보다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았으나 그저 사유네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언제 어색하게 굳어있었느냐는 듯 긴토키가 제 머리칼을 헤집으며 손을 내저었다.
“난 또 뭔가 했네. 됐다, 됐어. 그런 사랑놀음은 즈라녀석이랑 머리나 맞대고 생각을…. ”
“어머, 긴토키 군. 어디서 자꾸 끈적하고 단 딸기 향이 나는 것 같지 않니?”
“당연히 이런 건 같이 생각해봐야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보자고.”
그런 시시한 의뢰는 받지 않겠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연스레 긴토키가 방향을 틀었다. 넵, 물론이지. 지금 당장 생각해보려고 했어. 이 주제에 관해선 한없이 작아질 예정이었기에 긴토 키는 일단은 적당히 생각나는 대답을 내뱉었다. 어차피 생일 선물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던가. 적어도 이런 이벤트와 인연이 먼 그에겐 더욱 그랬다.
“뭐…. 평범하게 먹을 거나, 술이나. 그런 거?”
“사유네 씨는 뭔가 특별한 걸 주고 싶어서 의뢰하신 거 아니에요? 그럼 조금 비싼 거라던가….”
“새 폭탄은 어떠냐, 해?”
나름의 대답이 이어졌으나 사유네의 반응은 미묘했다. 사실 지금 나온 의견을 하나하나 다 고 려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음식이나 술은 너무 흔한 선물인 것 같고, 비싼 것을 준다 기엔 영지도 지위도 마다할 사람이었으니. 사유네에게 비싼 물건은 하나같이 카츠라가 받지 않을만한 것이었기에 더 어려웠다. 그리고 이번 생일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로 처음 맞 는 카츠라의 생일이다. 더없이 특별하게 축하해주고 싶었다. 최고의 생일은 되지 못하더라도 기억에 오래 남을만한 기념적인 생일이 되었으면 했다. 그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었으니까.
그 뒤로 온갖 생일 선물의 후보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왕 우마이봉, 비단 머리끈, 폭탄 머리 가발,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검…. 그리고 다시마초절임 상자까지. 하지만 사유네의 마음에 완벽하게 들어차는 선물은 찾을 수 없었다. 분명 머리를 맞대면 금방 답을 찾아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유네의 고개가 느릿하게 기울어지자 결국 긴토키가 털썩 몸을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버리며 한숨을 흘렸다.
“그러니까 요컨대 즈라 녀석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하고 싶다. 이거잖아? 그럼 어차피 답은 나 와 있는 거 아니냐.”
“그게 뭔데요, 긴상?”
신파치에 이어 카구라며 사유네의 시선까지 한곳으로 몰렸다. 정작 긴토키는 시큰둥한 반응이 었다.
“뭐긴 뭐야. 어차피 그 녀석이면 사유, 네가 뭘 주든 좋아서 날뛸 텐데. 아무거나 줘버려. 그 뭐냐, 굴러다니는 돌멩이라던가….”
“… 생각 없이 무책임하다, 해.”
“생각없이 무책임하네요.”
틀린 말도 아니지 않냐며 금세 왁왁 서로에게 외치기 시작한 해결사를 앞에 두고서 사유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카츠라라면 사유네가 무엇을 선물로 주든 좋아할 것이라니. 정말 그럴까? 물론 사유네가 반대인 입장이라면 정말 무엇을 받든 기분이 좋았을 테지만, 상황이 바뀌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명제가 새삼 낯설게만 느껴졌다. 당연히 카츠라와 처음으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일선물뿐만이 아니라 가벼운 물건에서부터 후원에 가까운 물품들까지 다양한 선물을 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오직 상대를 향한 마음과 감정뿐. 단순히 아 끼는 마음이 아닌 호감과 애정이 담긴 둘만의 관계였다. 서로를 떠올리고, 서로의 생각을 이어 가고.
어색하지만 아마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 사유네 씨? 괜찮으세요?”
“방이 더운 거냐, 해?”
이어지던 사유네의 상념을 깬 것은 신파치의 목소리였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며 사유네는 소매로 자연스레 제 뺨 한쪽을 가렸다. 체온보다 서늘한 소맷자락이 닿고 나면 약간은 달아오른 열기가 진정된 기분이었다.
“아무튼 한번 생각해보세요, 사유네 씨. 이렇게나 카츠라 씨를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고른 선물 이잖아요. 어떤 걸 주든 카츠라 씨는 좋아할 거예요.”
“뭐, 돌멩이가 별로면 어제 버린 영수증 같은 것도 괜찮으니까.”
“…저런 것만 빼면요.”
한차례 잦아든 줄 알았던 투닥임이 다시금 시끄러워졌다.
선물은 당연히 상대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을 골라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건보 다 마음이 중요한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관계의 시작을 밟았구나. 주변의 시 끄러움과 더불어 사유네의 마음도 소란스레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태어난 날을 축하해주고 싶 은 마음. 소중한 것을 전하고 싶은 마음. 상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 선물 하나 를 위해 쏟은 시간과 고민 모두에 그를 위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내내 그를 생각하고 떠올린 순간마저 전부 선물이 될 터였다. 그렇구나. 정말 이렇게 받는 선물이라면, 어떤 것을 주고 받아도 행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결국 사유네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처음과는 다 르게 정말 진실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고마워. 덕분에 고민이 풀린 것 같구나.”
“…? 어, 어. 그럼 다행이지만.”
정말 이런 걸로 괜찮은 걸까,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해결사 무리 너머로 사유네가 한결 편 해진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이어왔던 고민에 나름의 답을 찾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들려오는 것은 약간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 의뢰비에서 세탁비를 제외하면 얼마나 남을지 모 르겠다느니 설마 다음에 찾아올 때도 딸기우유가 기다리고 있느냐던가, 하는 짓궂은 놀림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금세 왁자지껄한 소동이 여름 햇살에 담겨 퍼져 나간다. 이토록 새파란 하늘 아래 달콤한 향기를 남기며 한때의 오후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이른 계절의 시작을 지나 새하얀 여름의 한복판을 열어젖힐 때까지.
***
어슴푸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의 끝자락에 새초롬한 초승달이 매달렸다. 이제는 제법 여름이라는 이름을 붙여낼 듯 미적지근한 밤 공기가 어울리는 날씨. 느긋한 여름밤이다. 불어 오는 바람에는 채 지우지 못한 햇살의 냄새가 사뭇 담겨있다. 아직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이르 다는 것처럼, 낮을 추억하는 그림자가 남긴 향기. 그 의지를 따르듯 잔잔한 밤을 가르고 물 위 를 미끄러지며 나아가는 한 조각배가 있었다.
사유네의 하얀 손끝이 잔잔하게 이지러지는 수면의 끝을 스쳤다. 자그마한 물방울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려 소매 끝을 가벼이 적셔낸다. 보름달이 떴다면 마치 두 개의 달이 뜬 것 같은 풍경을 보여주었을 텐데. 흐린 달빛은 수면 위에 반짝이며 흩어지기에 바빴다. 물안개와 흰 연 꽃이 어우러져 마치 다른 세상에 와있는 듯한 연못. 그 위에 두 인영이 조각배에 몸을 맡기고 서로를 마주 본다. 오늘은 그렇게 고대하던 카츠라의 생일이었다. 최대한 행복한 하루를 보내 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망설이다 결국 이 시간에 이르도록 선물을 전해주지 못했다.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보다, 이 선물을 전하면 정말 하루가 끝나버릴 것만 같아서.
행복하면서도 아주 찰나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무심코 이 오늘이 더 이어지기를 바랐다. 정원을 따라 피어난 꽃 덤불을 구경하고, 이르게 세워진 마을의 장을 둘러보고, 거리의 익숙한 소란을 만끽하고, 불꽃놀이 아래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손끝에 쥐어두고 싶을 만큼 즐거운 날 이었다. 생일 선물은 그가 아니라 사유네 자신이 받은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아쉬움을 걱정하려 마무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사유네의 목소리에 섞여 찬찬히 물방울을 튀기듯 퍼져나간다.
“코타로 군, 줄 것이 있는데. 잠시 손을 내밀어 주겠니?”
사유네의 시선을 따라 수면 위로 닿았던 카츠라의 눈동자가 사유네를 바라본다.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약간은 긴장한 기색으로 손을 내미는 그를 보며, 아쉬웠던 마음도 옅어져 웃음이 흘렀다. 표정에서부터 모든 생각이 드러나는 건 여전하구나. 내밀어진 카츠라의 손을 쥐고 부드럽게 감싼다. 거칠고 단단한, 검을 쥐는 사내의 손. 언젠가의 어리고 가벼운 손과는 달랐다. 이제는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손을 가진 사내. 사유네의 영지와 사유네의 행복을 지 켜낸 손이었다. 느릿하게 웃으며 카츠라의 손바닥 위로 머리끈을 하나 올려두었다. 그의 진중 한 눈빛을 닮은 보석과, 그에 어울리는 푸른 장식이 달린 머리끈. 거창하거나 화려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색과 짜임이 잘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금세 귀 끝이 묘하게 붉어 진 채로 눈을 깜빡이고 있는 그를 향해 사유네가 웃었다.
“직접 만든 머리끈인데. 이래보여도 그나마 제일 괜찮은 의견을 받아서 만든거란다?”
“… 이걸… 사유네가 직접.”
아무리 그래도 돌멩이나 폭탄머리 가발을 줄 수는 없었으니. 가장 나은 의견이긴 했다. 원래는 요즘 유행한다던 ‘선물은 바로 나야~’ 하는 것도 고려해보았으나, 이미 준 것을 다시 선물로 줄 수는 없지 않던가. 적어도 사유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에서 머리끈을 처음 본 사람처럼 손안에 소중히 담고 바라보는 카츠라를, 사유네는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처음 만들다 보니 끈의 마감이 조금 서툴렀을지도, 혹은 보석의 색이 어울리 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전부 지워냈다고 생각한 불안감이 느릿하게 피어오르는 기분.
“… 마음에 드니?”
“… 하고 다니지 못할 것 같네. 이건, 이런 건….”
목소리가 떨린다. 예상과 다르게 카츠라는 한참이나 굳어있다가 시간이 지나고서야 머리끈을 꼭 손 안에 쥐어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고요한 연못을 울리는 것은 카츠라의 격양된 목소리였다.
“이런 선물은, 너무 소중해서 사용할 수 없네! 평생 보물로, 아니 가보로 간직해서 품속에 넣 고 다닐 것이네!”
사유네가 직접 만들어준 머리끈이라니. 혹시나 사용했다가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전투 중에 베 여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카츠라의 머릿속에서는 벌써 해진 머리끈을 찾아 산을 넘고 강바닥 을 뒤지는 모습까지 흘러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전히 붉은색으로 변해있는 귀끝을 한 채 로, 카츠라는 사유네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아까 사유네가 그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카츠라의 얼굴은 정말 말 그대로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웃음이 담긴 표정이었다.
“고맙네, 사유네. 오늘 하루도, 이 선물도. 내가 보낸 생일 중 최고의 날이었네.”
“… 코타로 군.”
“… 사실 아직도 내가 곁에 있어도 된다는 게 완전하게 와 닿지는 않네. 매일 꿈이 아닐까 생각해. 하지만.”
잠시 벅차오른 감정을 다듬어내듯, 터져 나오려는 호흡을 갈무리하듯, 카츠라가 숨을 멈췄다가 입을 연다. 이번에는 떨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적어도 내가 사유네를 지킬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네.”
카츠라가 웃었다. 누구보다 환하게 웃는다. 세상을 다 가지고도 얻을 수 없는 기쁨이라는 듯이. 사유네는 잠시동안 달빛에 비친 그가 미소 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기분 좋게 흘러넘치는 웃 음소리가 귓가를 울릴 때마다 마치 심장마저 따라 쿵쿵 울려대는 기분이었다. 두근대는 심장 부터 맞닿은 손끝까지 전부 간지러워 견딜 수 없는 감각. 이래서야 누가 선물을 받은 것인지. 결국 가볍게 카츠라의 손을 잡아당긴 사유네가 그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자신이 받은 최고의 선물에게 입을 맞추었다. 뜨거운 뺨과 입술. 숨결이 닿은 거리가 천천히 떨어지면 누구랄 것 없이 붉어진 귀와 뺨을 한 채로,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웃음을 흘려냈다. 아, 이 감정에는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여야겠구나.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이토록 심장 속이 시끄러워지는 느낌에는.
“앞으로의 생일도, 잘 부탁하네. 사유네.”
카츠라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두 사람의 연못가를 울린다.
“생일 축하해, 코타로 군.”
사유네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달빛 너머로 화답한다.
행복한 시간은 아무리 길게 이어져도 부족하기만 했다. 맞물리지 않은 감정이 길었던 만큼 전 하지 못한 마음과 이야기가 한없이 쌓여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서 끌어안고 고민하지 않 아도 된다는 사실이. 앞으로의 생일을 넘어, 일상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이. 기꺼이 아쉬운 오늘을 보내고 함께인 내일을 꿈꾸게 했으므로.
잔잔하게 일렁이는 수면이 피어오른 물안개를 따라 달빛으로 젖어갔다. 푸르게 빛나는 어느 이른 여름의 사이로, 이따금씩 가벼운 웃음소리와 즐거운 목소리가 퍼져나간다. 언젠가 오늘을 떠올린다면 행복이라는 두 글자가 남아있도록, 느릿하게 저문 어둠과 반쯤 기운 초승달 아래 에서 이야기는 오래 이어졌다. 두 사람의 행복한 생일이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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