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내내 정오正午의 궤를 그릴 이들에게
남그꼼 님 [따뜻한 눈](동양풍 후궁(망국의 왕세자)X황제 AU)
글/소설

따뜻한 눈 

 

 

 

 

"손발의 힘줄을 끊어 놓으셔야 합니다."

"발이 아니라면 손만이라도 반드시 폐하셔야 합니다."

"망국의 왕세자라니, 너무나 위험합니다. 겉으로는 저리 고 분고분하게 보여도 폐하께 어떤 원한을 품고 있을지 모르는 일 이 아닙니까? 이런 이를 내명부에 들여 황실의 가족으로 대한 다는 것은—"

"입을 조심하라!"

 

서릿발 같은 호령이 떨어지자 서령궁(西寧宮)에 서늘한 침묵이 돌았다. 잠시간 분위기를 타고 너나할 것 없이 말을 얹어 대 던 후궁들은 눈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짐이 직접 선택하여 황명으로 들인 후궁이다. 그를 의심하는 것은 곧 짐의 결정을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없을진대, 정녕 그대 들이 황실을 능멸할 셈인가?"

 

창 밖으로는 눈발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철 눈이 멈추지 않는 나라, 대유(大瑜)의 황제, 시라카베 사유네. 이 세상의 모든 나라 를 다스리는, 천하 통일의 업적을 이룬 황제이자 이 나라의 건국 황제인 그의 권위를 의심할 수 있는 자는 감히 없을 것이었다. 각종 비단으로 화사하게 꾸민 후궁들이 모두 모인 이 자리는 그야말로 만개한 꽃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 꽃들은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다. 시라카베 사유네는 자신의 사람들에 게 너그러운 황제였으나, 또한 반발하는 자를 다스리는 위엄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황실의 권위가 자리잡지는 못했을 터였 다. 그 치세를 지나치리만치 잘 알고 있는 것이야말로 궁에 거하 는 이들이었으니, 모두는 젊은 황제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와중, 현재 내명부의 총괄 을 맡고 있는 희비(熙妃)가 나섰다.

"폐하, 목숨을 내어놓고서 감히 간언드리옵니다. 이들이 단지 후궁의 시기와 질투만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 다. 사람의 마음이란 깊고도 깊은 법. 아무리 우리의 발 아래로 복속되었다 하나, 결국 우리 대유는 저들, ……계 귀인에게 있어 나라를 무너뜨린 원수로도 여겨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까. 후 궁은 여타 궁인들과도 달라 폐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 는 직책인데, 혹여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그것을 어찌 감당하올 는지요. 폐하의 신변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털끝만큼의 위험 도 허용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 말에도 시라카베 사유네의 눈에서는 별다른 흔들림이 보이 지 않았다. 희비는 눈을 꾹 내리감으며 말을 뱉었다.

 

"다들 폐하의 안전을 염려하여 하는 말일 것입니다. 너무 노 하지 마시옵소서."

 

희비가 말하는 것은 실상의 절반 정도이다. 적국의 왕세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 혹시라도 황제의 안전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리고 다른 절반은 결국 후궁들 간의 세력 싸움 이었는데, 건국 초기로 황후를 공석으로 둔 상태에서 세력의 균 형을 위해 후궁만을 들이고 있는 지금에 있어 새로운 총애를 받는 후궁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반기지 않을 만한 일이었 다. 망국의 왕세자라고 하나 보기에 따라서는 곧장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죄인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을 곧장 후궁 중에서도 서 열이 높은 귀인으로 봉했으니 자연히 그들의 경계도 심해질 만 했다. 황제가 침묵하고, 후궁들끼리 희비의 말에 동조하며 비밀 스런 눈짓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 낮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지 금까지 이 자리에서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낯선 목소리였다.

 

"그리 하십시오."

"뭐라고 했지?"

"그리 하시라 했습니다. 제 손발의 힘줄을 끊어 두십시오. 운 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섣불리 폐하를 위협하지도 못하게 될 테니."

 

단정하게 묶어 올린 검은 머리 아래에서 감람 색의 눈이 번뜩 였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포로의 신분으로 대전에 끌려와 옥좌 앞에 무릎꿇고 있던 자, 망국의 왕세자, 그리고 그 자리에서 머 리카락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귀인의 신분을 받아 이 자리에 있는, 이 논쟁의 당사자인 카츠라 코타로였다. 사유네는 잠시 어 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코타로는 눈을 피하지 않 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황제의 입이 열렸다. 조금 전, 후궁들 의 말에 화를 내던 때보다도 더욱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이들의 말이 맞군."

"……." "포로에서 후궁의 신분을 가지게 된 이상 그대는 이미 나의 것 이다. 그대는 황제의 소유에 해당하므로, 스스로 그 몸을 해치려 드는 것 또한 대죄에 해당함을 모르는가."

 

코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라카베 사유네는 몸을 돌리며 명을 내렸다.

 

"계 귀인은 후궁으로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황실의 법도를 가 볍게 생각하여 그 방자함이 심하므로 석 달간 근신하도록 하라. 궁에서 나오는 것을 금하고, 녹봉도 절반으로 감하도록 한다."

"폐하, 그러면 폐하의 안전에 관한 것은……."

"그 이상 말하지 마라."

 

녹(祿) 귀인이 조금 다급하게 궁을 빠져나가는 시라카베 사유 네의 말끝을 붙들었지만 황제의 명은 단호했다. 희비가 옆에서 눈치를 주는 것이 느껴져 녹 귀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책봉되자마자 근신을 명령받은 후궁이라니, 전례에 없는 일 이 아닙니까."

 

황제의 발걸음이 멀어져 그 소맷자락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후궁들 사이에서는 풋 하는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 하십시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감사히 여겨야지. 조그만 나라의 왕족이라 황국의 법도는 알지도 못하나 보구나."

"그런데 형님, 아무리 그래도 굳이 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근신을 명하신 것은 폐하께서 저 자에게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실지요?"

"너는 무엇을 모르는구나. 근신령이 내려진 후궁을 폐하께서 만나러 오실 일이 있겠느냐? 석 달이면, 잠깐 마음에 들었던 외 모 따위 잊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결국 목숨만 건진 채 이 황궁 안에서 찬밥 신세가 되겠지."

 

화려한 비단을 휘감은 후궁들은 그 자리에 마치 코타로가 없는 것처럼 저들끼리 떠들어댔다. 아까는 주변을 중재하려던 모 습을 보이는 척 하던 희비도 지금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코타 로는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가만히 쥐어잡은 손에 서 핏줄이 돋고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무시하거나 백안시당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새로운 후궁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반겨 지지 않는 존재인데다, 조그마한 나라의 포로로 잡힌 왕족이라 니 제가 생각해도 초라한 신세였다. 그러나 이런 대놓고 하는 조 롱은 참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타로가 아무 대꾸도, 움직임도 하지 않았던 것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평생 왕세자로 서 살아온 자신은 황제국의 후궁들 사이에서 어떤 말로 처신하 고 어떤 말로 반박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이 없었다. 그조차도 이 상황을 더욱 답답하게 하는 것 같아 코타로는 그저 자리에서 주 먹을 꾹 내리누르고만 있었다.

 

***

 

근신령은 차라리 편안했다. 그가 받은 향화궁(䅨和宮)은 황궁 의 다른 전각들처럼 새롭게 지은 건물 티가 났고, 궁인들은 망국 의 왕세자인 그와 말을 섞기를 두려워했지만, 어차피 담소를 나 눌 생각 따위는 없었기에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코 타로는 들여올 수 있는 대로 책을 요청해서 책을 읽고, 마음에 드 는 글귀들을 필사했다. 궁인들이 놀라는 것은 아랑곳않고 궁에 서 할 수 있는 소일거리들을 돕기도 했으며, 남는 시간에는 되는 대로 움직이며 몸을 단련했다. 본래라면 검을 수련했을 텐데, 금 군이 아니고서야 궐 내에 무기를 반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후궁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코타로는 황제의 총애를 원 하지 않았고 호화로운 삶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음 속 에는, 처음 후궁들이 말했던 것과 같은 울분이 있었기에, 무엇이 되었든 이 황실에서 베풀어 주는 것들이 그다지 달갑게 여겨지 지도 않았다. 풀 수 있는 길이 없음이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동물이라도 기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심부름을 다니거나 식료 품을 받기 위해 오가는 궁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 희비나 한비( 嫺妃) 같은 후궁들은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주인 뿐만 아니라 궁인들에게도 워낙 애교가 많아서 귀여움을 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는지 모르게 두 달이 흘렀다. 사철 눈이 내 리는 이 나라에도 계절이라는 것은 있어서, 겨울을 맞아 해가 짧 아지고 찬바람은 더욱 심해지는 때였다. 갑자기 바깥에서 소란 스러운 소리가 나기에 코타로가 나가 보았더니, 녹 귀인과 이름 을 모르는 후궁들 몇 명이 궁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귀인."

 

후궁들을 막아서던 궁인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코타로에게 다 가왔다.

 

"어떻게 좀 해 보십시오. 폐하께서 내린 근신령이 아직 풀리지 않아 향화궁은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데, 이렇게 막무가 내로 들어오려고 하십니다. 혹여 폐하께서 아시게 되면 어떤 불 호령이 내릴지……."

"흥, 폐하께서 이런 한미한 곳의 일에까지 신경을 쓰실 만큼 한가한 분으로 보이시더냐? 들어오자마자 벌이나 받은 주제에, 이렇게 다른 황실의 가족들이 선물을 들고 찾아오면 고맙게 여 겨야 하는 것 아니겠어?"

"서, 선물이요?"

"그래, 네 눈은 눈이 아니고 옹이구멍이더냐? 내 두 달간 폐하 는커녕 남들과 말 한 마디 섞어 보지 못한 계 귀인이 안쓰러워 특 별히 담소라도 나누어 줄까 하고 온 것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녹 귀인이 손짓하자, 녹 귀인의 뒤에 있던 궁 인이 붉은 칠로 장식한 찬합을 내밀어 보였다.

 

"빨리 가서 찻상을 준비하거라. 설마 이 궁 사람들은 손님 대 접하는 법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모를 수도 있지요. 우리가 지금까지 서 있는데 아직도 한 마 디도 못 하는 걸 보십시오. 주인이 이 꼴인데 아랫것들이라고 어 련하겠습니까?"

 

키득이면서 그들은 코타로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궁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이것 봐, 화로에 온기도 없네. 의자에 방석은 또 어디 갔어? 계 귀인은 불은 쬐면서 사는 건가? 이건 상재의 처소만도 못하 네."

"하 상재는 전에도 폐하와 시로 담소를 나누었잖아."

"빨리빨리, 불을 더 피워라. 이래서는 가져온 떡도 죄다 얼어 버리겠구나."

 

남의 궁에 와서 마치 자기 궁인들에게 하는 것처럼 명을 내리 는 모양도, 명백히 코타로를 제대로 된 일궁(一宮)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코타로는 평소보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이들도 손님 대접 정도는 할 줄 압니다. 찻상은 곧 마련 될 테니 잠시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제대로 된 차는 있겠지? 좋은 찻잎은 기대도 안 해. 마실 수나 있는 게 나오면 좋겠군."

 

녹 귀인과 하 상재를 위시한 무리가 수선을 피우는 동안 코타 로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이들이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 까? 설마하니 말하는 그대로 자신이 불쌍해서 보러 와 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식의 대화는 코타로가 원하지도 않는 바였고, 아마 무엇이든 볼일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냥 있는 대로 물어보자고 코타로가 생각할 때쯤 궁인들이 떡과 과자, 차를 내와 그들 앞에 놓았다.

 

"어머, 형님. 떡 모양이 너무 곱습니다. 하얀 떡에 새겨진 무늬 가 마치 서리꽃 같네요."

"녹 귀인의 숙수는 간식을 맛있게 만들기로 유명하니까. 이번 에도 참으로 기대가 되는구나."

"이런 것을 근신령을 받은 계 귀인을 위해서 손수 준비해 주 시다니, 정말 마음도 넓으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계 귀인?" "예, 뭐……."

 

코타로는 적당히 대답하며 떡에 손을 가져갔다. 독이 들어 있 지는 않겠지. 자신이 그 정도로 위협이 되는 존재도 아닐 것 같 거니와, 만약 독살이 목적이라면 이렇게 요란하게 여럿이서 쳐 들어올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니 일단 곧장 물어보고, …….

"으읍?"

 

떡을 한 입 베어물어 씹던 코타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쫀득 한 떡 안에서 쏟아져 나온 퍼석하고 축축한 것은 분명,

 

"푸훗!"

 

코타로를 지켜보던 하 상재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맞추어 다른 후궁들도 일제히 소매로 입을 가리거나 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어쩌나, 계 귀인. 간식이 입에 맞지 않아? 촌구석에서 살다 가 전장에서 이리로 끌려오면서 바닥을 많이 기었지 않아? 그 러면서 꽤나 들이마셨을 추억의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배려 가 틀렸어?"

 

떡 안에 들어 있던 것은 흙이었다. 들큰하고 찐득한 떡의 맛과 까끌까끌하고 젖은 냄새가 나는 흙이 뒤엉켜 불쾌한 향을 만들 어냈다. 코타로는 떡을 뱉었다.

 

"왜 음식을 뱉어? 임신이라도 했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 폐하께서는 저 자를 보러 오시 지도 않을 텐데."

 

깔깔거리는 목소리들이 빙글빙글 주위를 감쌌다.

 

"촌에서는 먹을 게 부족해서 흙이라도 퍼먹는다고 하지 않나? 갑자기 너무 고급스런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날 것 같아서 특별히 맞춰서 준비한 건데 마음에 안 들어?"

"나눠 먹을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나눠 먹을 사람들?"

"가족들도 다 죽고 천애고아 신세가 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리운 맛을 나눌 사람들이 없어서 그만 목이 메었을 수도 있 잖아요."

 

퍽! 그 순간 하 상재의 얼굴에 주먹이 틀어박혔다. 비명이 터 지고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하 상재가 쓰러지면서 떨어진 찻 잔이며 접시들이 박살났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한 마디만 더 지껄여 봐."

 

얻어맞은 하 상재는 차마 말도 못 하고 뺨을 감싸고 있고, 녹 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코타로를 추궁했다.

 

"다시는 그런 소리를 입에 못 담도록 만들어 주겠네."

"황제 폐하의 후궁을 때려 피가 나게 하다니! 그리고 황궁에 서 감히 무력으로 남을 상하게 만들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아?"

"목숨 따위 이미 예전에 한 번 죽었던 거나 다름없는데, 내가 그런 데 미련이라도 있을 것 같나?"

 

코타로는 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녹 귀인을 향해 한 발 더 걸어갔다. 녹 귀인은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나다가 허우적거 리며 외쳤다.

 

"누, 누가 빨리 사람을 불러와라! 향화궁에서 계 귀인이 주먹 을 휘둘러 하 상재가 맞고 쓰러졌다고! 사람이 상했단 말이다!"

 

그런데 이미 녹 귀인을 따라왔던 궁인들은 보이지 않았고, 다 른 후궁들만 녹 귀인 뒤에서 주춤거리며 코타로와 주변의 눈치 를 보고 있었다. 아마도 하 상재가 쓰러지는 시점에서 이미 소식 을 전하러 밖으로 달려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코타로는 그런 것 은 아랑곳않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녹 귀인을 바라보았다.

 

"나를 무시하거나 모욕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조국과 이미 망자가 된 사람들까지 들먹이는 것은 참을 수 없군. 그건 앞으로 도 잘 알아 둬야 할 거야."

"폐, 폐하께서 이런 짓을 용납하실 것 같으냐? 지금도 근신 중 인 주제에 이런 소란을 벌였다는 것을 폐하께서 아시면 너는 그 날로 목이 달아나도 모자라!"

"폐하가 아니야. 지금 당신 앞에 있는 건 나다. 제대로 대답 하게."

"이…!"

"황제 폐하 납시오!"

 

녹 귀인이 있는 대로 얼굴을 붉히면서 벌벌 떨 때, 궁 바깥에 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궁들도, 어쩔 줄 모르던 궁인들 도, 그리고 카츠라 코타로마저도 일순 동작을 멈추고 궁문을 바 라보았다. 새하얀 비단에 금빛 자수가 찬란한 용포 자락을 휘날 리며, 내관과 궁인들을 대동한 시라카베 사유네가 거침없는 발 걸음을 옮겼다.

 

"폐하!"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하 상재가 얼른 꿇 어앉는 척 하면서 비틀거리자, 녹 귀인이 얼른 가서 그 팔을 잡 아 부축했다.

 

"이런, 넘어질 때 발이라도 삔 것이 아닌가. 이런 몸으로 절을 어떻게 해."

 

코타로가 보기에는 그리 대단치도 않은 상처였지만 하 상재는 뺨을 감싼 채 자리에서 끊임없이 훌쩍거리고 있었다.

 

"폐하, 계 귀인의 무도함이 하늘을 찌릅니다! 좋은 마음으로 찾아온 이들을 어찌 이리 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심지어 폐하 의 후궁을 상하게 하다니, 이는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대죄 입니다."

 

시라카베 사유네는 녹 귀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어 떤 심정이 담겨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향화궁에서 소란이 일었다는 이야기만 듣고 왔지. 상황을 설 명하라."

"저와 하 상재, 그리고 몇몇 동생들끼리 계 귀인을 위로하며 담소를 나누어 주려고 향화궁에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하 상재 가 하는 말이 어째서인지 모르게 계 귀인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짜고짜 주먹질을 하다니, 거리의 잡배 들도 이리 경우가 없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계 귀인은 아직까지 근신 중이지. 본래라면 향화궁에는 애초 에 외부인이 드나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계 귀인이 그대들을 초 대했던가?"

"그,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찾아온 쪽도 어명을 어겼다는 점에서는 죄를 피할 수 없겠구나."

"폐하, 하나, ……."

"계 귀인, 그대는 어떻지?"

 

녹 귀인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시라카베 사유네는 코타로 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코타로는 자리에 꿇어앉은 채 말했다.

 

"녹 귀인과 하 상재가 제 돌아가신 양친과 친척들을 모욕했습 니다. 저 한 몸이 천대받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이미 세상을 떠 난 이들을 비웃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지자면 그들은 우리 대유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죄인들 이다. 그 점은 알고 있겠지."

"예."

"그리고 어떤 이유가 되었건, 사사로이 무력을 휘둘러 나의 사람을 상하게 한 일은 죄인을 변호하는 것 이상으로 큰 죄다." "예. 그도 알고 있습니다."

 

시라카베 사유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타로의 죄상을 고하려던 다른 후궁들도 그 침묵 속에서 감히 입을 열 지 못했다.

 

"하 상재는 상처를 입었으니 처소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아라."

"…예, 폐하."

"녹 귀인과 다른 후궁들은 어명을 어기고 출입이 금지된 궁에 들었으니, 2주간 근신을 명한다."

"예."

 

생각보다는 가벼운 처벌이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 랐던 후궁들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제히 대답했다.

 

"그리고 계 귀인은, ……."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과 귀가 황제의 입을 향해 모였다.

 

"오늘부터 밤마다 상어전(常御殿)으로 오거라. 매일 내 일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돕는 것이 그대의 벌이다."

 

뜻밖의 말에 코타로가 퍼뜩 위를 올려다보았다. 시라카베 사 유네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폐하, 아무리 해도 그것은,"

"녹 귀인."

"소, 소첩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처사이기는 했다. 봉호도 없는 상재라 하지만 엄 연히 황제의 후궁에게 주먹을 휘둘러 상처를 낸 마당에, 밤마다 와서 일을 도우라니? 황제와 가까워지는 것은 후궁에게 있어서 기회이니 보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상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참 지 못하고 끼어들려던 녹 귀인을 한 마디로 조용히 시킨 시라카 베 사유네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바닥에 꿇어앉은 카츠라 코 타로를 보고 있었다. 코타로에게 그 존재는 처음, 커다란 대전 에서 높디높은 옥좌에 앉은 사유네를 보았을 때보다도 더 크게 느껴졌다. 범접할 수 없는, 황제보다도 더 큰, 마치 신과 같은 위 엄이 느껴졌다.

 

"대답하지 않는가?"

 

사유네가 물었다.

 

"……황명을 받듭니다."

 

코타로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

 

상어전은 황제가 업무를 보는 공간 가운데서도 편전(便殿)으 로, 정전에서 신하들을 알현하고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한 뒤 일 상적인 정무를 보는 공간이었다. 코타로는 사유네가 상소문을 읽는 동안 촛불을 갈았다.

 

"듣자하니 녹 귀인은 짐이 향화궁에도 새해 선물을 보내라고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을 벌였다고 하는 모양이더구나."

"……."

 

코타로는 가만히 말을 듣고만 있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별것도 아닌 일인데 말이지. 후궁끼리는 항상 그렇다. 황후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더욱 견제가 치열하지. 희비가 임시로 내명 부의 총괄을 맡아 주고 있지만 그 자신조차도 어찌 황후가 되기 를 원치 않겠는가. 아마 희비도 알고 방조했을 것이다."

"그렇군요."

 

코타로는 연적에 물이 남아 있는지, 서로 다른 기관에서 올라 온 문서들이 제대로 분류되어 있는지 살폈다.

 

"그대는 아무렇지도 않겠지? 이런 이야기들이 말이다."

"그, ……."

 

허를 찔린 것 같아 코타로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후궁들이 하는 암투는 그저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느냐는 말이다. 왕세자였던 그대에게 짐의 총애가 필요할까, 아니면 그 대가 출세를 원할까. 나에게 불려온 것도 실은 달갑지 않겠지. 후궁에게 있어서 황제의 부름은 신분 상승의 지름길이지만, 그 대에게는 그저 분란의 씨앗으로만 느껴지겠지."

"……송구합니다."

 

코타로의 말을 들은 사유네는 글씨를 쓰던 붓을 놓고 긴 한숨 을 내쉬었다.

 

"내가 그대를 너무 오래 혼자 두었구나."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아니,"

 

사유네는 고개를 저었다.

 

"첫 날에도 말했지. 나는 예쁜 인형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설 령 처음에 머리칼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그대를 들였다 해도, 후궁에 든 이상 그대는 내 사람이다. 그리고 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속속들이 알고 싶은 법이지. 그러니 그대의 이야기를 해 보거라."

"제 이야기라면, ……."

"뭐든지 좋아."

 

소일거리로 듣겠다는 듯 사유네는 다시 상소문을 집었다. 그 러나 더 이상 연적이나 문진을 살피지 못하게 된 코타로는 우뚝 서서 말을 고르고 있었다. 무엇을 이야기하라는 말인가?

 

"……어릴 때부터 검술을 연마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왕세자로 일찍 책봉되어서 밖으로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었는데, 수련을 명목으로 하면 넓은 곳에서 마음껏 몸을 쓸 수 있었으니까요."

 

사유네는 듣고 있다는 듯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타로 는 말을 이었다.

 

"같은 이유로 말을 타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귓가로 바람이 스 쳐지나가는 게 기분이 좋아서……."

 

이런 이야기가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부왕과 모후와 함께 말을 달릴 때, ……. 달려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애초에 끝이 있는 길이 아니었지요. 저희는 대유의 병사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으니까요."

 

코타로는 말하고서 황제를 슬쩍 바라보았지만 상소문을 읽고 답을 써 내려가는 사유네의 손에는 변함이 없었다.

 

"부왕께서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함성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저는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에 횃불들이 무수히 뒤를 쫓고 있는 풍경이 마치 짐승 떼에게 쫓기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앞에도 매복이 있었지요. 그들 이 땅에 함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철사에 발이 걸린 말이 앞 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모후께서는 절명하셨습니다. 부왕께서는 옥새와 보검을 저에게 넘겨주며 도망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도망쳤습니다. 병사들을 맞으러 돌아서는 부왕을 두고, 말을 달려서 숲으로 향했습니다."

 

코타로는 사유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을 죽여 볼 수 있으면 죽여 보라는 양, 정복자인 황제가 듣기 에 껄끄러운 이야기를 날것 그대로 늘어놓았다. 그러나 사유네 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글씨를 쓰는 손은 점점 느려졌지만 움 직임이 멈추지는 않았다. 코타로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 후에 저는 어느 산골 마을에 몸을 의탁했지요. 후일을 도 모하려고 했으나 붙잡혔습니다. 결국, 네. 붙잡혔지요. 이 나라 에서 자비롭다 말해지시는 폐하이시나 저는 저와 뜻을 같이해 준 그 마을 사람들이 저와 함께 모두 붙잡혀 끌려온 것을 기억합 니다. 그들을 다 죽이셨습니까?”

 

사유네는 그제서야 코타로를 돌아보았다. 투명한 푸른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사유네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귀순하고 그대가 모으던 군의 잔당들이 어디 있는지 행방을 고한 이들은 이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 은 경우에는,”

“죽이셨군요.”

 

코타로는 주먹을 꽉 쥐고 사유네를 노려보았다. 풀 길 없는 증 오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시선이었다. 본래라면 이렇게 황제 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황제는 그에게 사형을 명할 수 있다. 그러나 사유네는 턱을 괴었다. 그 시선이, 그 태도가, 결국 코타 로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묻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 이었다. 그래서 너는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무엇을 했느냐 고. 칼이라도 들고 지금 나에게 덤비지 않고, 여기서 나를 도우 며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입만 산 비겁자는 아닌가. 황제에게 사로잡힌 일국의 왕세자가, 그저 머리카락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후궁 에 들었다. 지금 이 길고 검은 머리가 아니라면 그의 목은 이미 잘려 저 거리 한가운데에 걸려 있을까? 단지 이 때문에 나는 살 아서 연명하고 있는 것인가? 마음 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은 점 차 원망으로 바뀌었다.

 

"왜……."

 

코타로는 이를 악물었다. 분해서인지 억울해서인지 모를 울 음이 목 안에서 치받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하십니까. 폐하."

 

사유네는 붓을 멈추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애써 울음을 삼 키는 카츠라 코타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는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이 나라의 후궁이 된 것도, 망 국의 왕족으로서 홀로 목숨을 건졌다는 치욕도. 모두, ……마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흔드십니까. 기어코 이런 이야 기를 들으셔야겠습니까?"

 

시라카베 사유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젖어 있는 코 타로의 뺨에 손을 얹었다.

 

"세상은 무정하지."

 

불빛에 비쳐 벽록색으로 보이는 눈이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서리처럼 차가운 빛을 띤 그 눈 안에서도 불길은 일렁일렁 타오 르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도 다르지 않다. 내 양친은 이르게 세상을 떠나 셨고, 적국과의 전쟁에서는 가족들을 잃었다. 나라를 통일하면 서는 얼마 남지 않은 황실의 친족들마저 모두 세상을 떠났지. 황 위에 올랐으나 주변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사유네의 손이 천천히 코타로의 뺨을 쓸었다. 눈물이 닿은 손 에 스며들어 문질러진다.

 

"이리와 승냥이 떼처럼 황권을 노리는 세력들. 젊은 황제를 인정하지 않고 끌어내리려는 이들. 절대적으로 신뢰가 부족한 조정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감정이라고는 없는 철인처럼 행 동해야 할 때도 있었고, 모든 힘든 일과 외로움이라는 것은 결 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어야 하기도 한다. 실은 지금도 마 찬가지이지."

 

손가락은 이제 입술에 닿았다.

 

"세상은 쓴 독이다. 그러나 마시지 않고서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그 쓴 맛과 속이 타는 고통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다."

 

코타로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어깨와 목이 울렁거렸다.

 

"그대가 지금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듯, 죽은 듯 자신을 없애고 숨만 붙어 있는 채로 지내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세계 전체 가 지금의 그대에게는 결국 인간으로서 살아가려면 감내해야 할 쓴 독이다."

 

마치 그 독을 마시려 입을 열라는 듯 사유네의 손은 그의 입술 을 짤막히 눌렀으나 이내 손은 그에게서 떨어졌다.

 

"한 번에 마시라고는 하지 않지. 그러나 시간을 들여 나를, 그 리고 이 곳을 겪어 보거라. 세상이 영원히 멈춰 있지는 않을 것 이다."

 

시라카베 사유네가 도로 자리에 앉아 몸을 돌리려고 할 때, 카 츠라 코타로는 문득 물었다.

 

"폐하를 겪어 보라고 하신다면."

 

사유네가 그를 돌아보았다.

 

"안지는 않으십니까?"

"강제로 하는 취미는 없다."

"강제가 아닙니다."

"그대가 몸을 내주고 마음을 닫으려는 것을 알지.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유네는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도로 서류를 집어들 어 읽기 시작했다. 코타로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삼경( 三更)이 지났을 때 또 한 번 초를 갈았다.

 

***

 

봄이 찾아왔다. 눈이 멈추지는 않았으나 날이 온화해지고 매 화 꽃봉오리가 가지에 맺히기 시작하는 때였다. 근신령은 작년 에 풀린 지 두 달이 더 지났고, 황제가 내리는 새해 선물도 향화 궁에 도착했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코타로는 계속해서 상어 전에 들며 사유네가 국사를 보는 것을 도왔다. 날마다 황제와 가 까이 있게 되니 다른 후궁들도 차마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 다. 얼마 전에는 심지어 희비마저 그에게 찾아와 선물을 남기고 말을 나누고 갔다.

 

"자네는 처음부터 후궁으로 지낸 것이 아니잖나. 망국이라 해 도 한때 왕세자였던 사람이지. 그게 폐하께서 국정을 돌보시는 데 꽤 도움이 되는 모양이지?"

"아무래도 그런가 봅니다. 물론 제도도 규모도 제가 알던 것과 는 많이 다릅니다만, 보조를 해 드리는 정도이니 지금 정도만 알 고 있어도 괜찮은 듯합니다."

"과연……."

 

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와 같은 후궁이 있어서 폐하께서는 든든하시겠군."

"……과찬이십니다."

 

코타로도 이제 이런 말에 겸양을 표할 정도로는 발전했다. 희 비는 찻잔을 기울이다가 그에게 물었다.

 

"참, 이번 사냥 대회에 자네도 참가하나? 듣자하니 예전에 검 술을 익혔다고 하고, 승마도 잘 할 테니 아마 참가할 거라고 생 각했네만."

"사냥 대회 말입니까?"

"매 해 봄에 폐하께서 황실의 사람들을 이끌고 사냥 대회를 여신다네. 식구들과 가까운 신하들과 친목을 도모하시는 목적 이지."

"그렇습니까. 아마도 부르실 것 같으니 참석해야겠지요."

"대회에서 활약한 자에게는 폐하께서 큰 상을 내리시지. 원 하는 것을 들어 주시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 실력을 뽐내 보 시게."

"희비께서도 참가하십니까?"

 

희비는 싱긋 웃었다.

 

"나는 활을 잘 쏘거든. 어릴 적부터 집에서도 명궁으로 칭찬을 받았던 몸이야. 자네가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다 해도 사냥 대회 에서는 멀리서 사냥감을 노릴 수 있는 활이 더 뛰어날 것이 아닌 가? 폐하의 상을 노리려면 꽤나 긴장해야 할 게야."

 

그 말에 코타로도 짤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저 또한 지지 않겠습니다. 각오하십시오."

 

***

 

사냥 대회는 나무들에 새 잎이 돋을 때쯤, 달의 첫 날에 열렸 다. 황궁에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커다란 숲에는 천막이 수십 여 개나 늘어서고, 색색의 깃발들이 위사(衛士)들과 함께 위풍당 당하게 섰다. 사유네는 애마인 시로를 타고 중앙에 위치한 천막 앞으로 나섰다. 오색 실과 금으로 된 장식을 늘어뜨린 마구(馬 具)가 화려하게 시선을 끌었다.

 

"또 한 해가 돌아와 좋은 시절에 사냥 대회를 여니, 황실의 식 구와 신하들은 모두 마음껏 무용을 뽐내 보아라. 가장 큰 짐승을 잡아 오는 이에게는 상을 내리겠노라!"

 

시라카베 사유네가 검을 뽑아들고 외치자 주위를 둘러싼 이들 로부터 커다랗게 함성이 일었다. 드물게 청명한 하늘에서 떨어 지는 햇빛이 황제의 검 끝에 가닿아 하얗게 빛났다.

 

"매 반 시진마다 북을 울려 시간을 가늠하도록 할 것이다. 신 시(申時)까지 도로 자리에 집결하도록."

 

말을 마치고 시라카베 사유네가 선두로 하여 달려나가자 여 기저기서 함성이 울리며 사람들이 각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 느새 활을 정비한 희비가 저편으로 말을 달리는 것이 보였다. 실 상 후궁들 중에서 적극적으로 대회에 나서는 이들은 희비와 코 타로 둘뿐인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은 특별히 이렇다 할 무용을 갖고 있지 않은지 천막을 지키거나 근처를 돌아보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코타로는 희비가 가는 길을 보다가 얼른 사유네의 곁 으로 따라붙었다.

 

"음? 무엇이지. 설마 내 사냥감을 빼앗을 생각일까?"

 

바로 옆에서 말을 모는 코타로를 본 사유네가 장난스럽게 물 었다.

 

"실로 그러합니다.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무용이 뛰어나시 니 가장 큰 짐승을 잡을 확률도 높을 것이고, 그러면 폐하의 곁에 있는 편이 제가 상을 노리기에도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후후!"

 

사유네는 즐거운 듯 웃고는 코타로를 한번 쳐다보고 더 빨리 저 앞으로 말을 몰아 나갔다. 형식적 행사라는 의미가 큰 사냥 대회라고는 하나, 황제의 일상적인 직무에서 벗어나 말을 달리 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를 따라잡으려면 꽤 재주가 있어야 할 텐데. 시로는 내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온 애마다. 승마로는 무관들에게도 뒤지 지 않을 자신이 있지. 그러니 어디 그대의 방자한 목적이 정말 이 루어질 수 있는지 보자꾸나!"

"저 또한, 어릴 적부터 말을 타고 산과 들을 누비던 자입니다. 반드시 폐하의 곁을 따를 것입니다."

 

코타로 또한 그렇게 말하면서 황제의 흰 말을 따라 숲 안으 로 들어갔다. 이윽고, 저 멀리서 흰 천 조각이 나부끼는 것이 언 뜻 보였다.

 

"코타로 군!"

"예, 폐하!"

 

코타로는 속력을 내어 흰 천 조각이 보였던 쪽의 오른편으로 향했다. 이 사냥 대회에서는 미리 풀어 둔 짐승들에게 각각 푸른 색, 붉은색, 노란색, 흰색의 표시를 하여 사냥한 짐승의 색에 맞 는 상을 내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흰색 천을 뿔에 감은 사슴은 대회에서도 단 두 마리밖에 없는 가장 큰 사냥감이었다. 이를 놓 칠 수 없다고 판단한 사유네가 코타로를 불러 사슴을 몰아 가기 시작했고, 황제의 의도대로 두 사람은 그들을 피해 달리기 시작 한 사슴을 쫓아 숲 속을 달렸다.

 

"왼쪽에 막다른 길이 있을 테다. 조금 더 붙어 보아라, 코타 로 군!"

 

코타로는 사유네의 말대로 사슴의 곁으로 거리를 좁히는 한 편, 그 꽁무니를 향해 단창을 던졌다. 확실히 희비가 말한 것처 럼 이런 사냥에서는 활을 쏘는 편이 유리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 무기는 검이었고, 이점을 살리자면 사냥감을 몰아넣어 일격에 목숨을 끊어 놓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코타로가 단창을 던진 순간,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달리고 있 던 사슴의 모습이 휙 사라졌다.

 

"무슨…?"

 

분명 뒤쫓고 있었는데,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두리번 거리는 코타로에게 문득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것은, 그러니까 분명, 예전에 병사들에게 쫓길 때와도 비슷한 느낌의……. 핑! 갑작스럽게 그의 옆으로 화살 한 대가 스치고 지나갔다. 코타 로는 속으로 크게 놀랐지만 말이 날뛰지 않도록 진정시키는 것 이 먼저였다. 그리고 그러면서 코타로는 곧장 외쳤다.

 

"사유네!"

"코타로 군?"

 

나무 두어 개 건너에서 사유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 리도 어딘가 다급하고 의문에 차 있었다.

 

"사유네, 기습이네! 아마 숲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아. 이 게 대체……."

"… 코타로 군, 붙지 말고 그대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달려라. 길을 되짚어 간다."

 

핑! 그 사이에도 화살 몇 대가 그들의 근처로 날아왔다. 숲이 빽빽 해서 다행이었다. 그들을 피해 날아간 것도 있었고, 중간에 나무 에 가로막힌 화살들도 있었다.

 

"이런……!"

 

코타로는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며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사 유네가 보이는 곳으로 급히 달려갔다.

 

"사유네, 몸을 낮추고 말을 몰아 주게! 화살은 내가 방어할 테 니."

 

그 말과 함께 코타로는 안장에 붙은 끈을 당기면서 몸을 휙 떠 올려 시로에, 사유네의 바로 뒤에 올라탔다.

 

"이 무슨…!"

"시로가 흰색이라 흩어져 달려도 오히려 자네만 표적이 돼. 차 라리 이 편이 낫네."

 

코타로의 말에 사유네는 알아들었다는 듯 곧장 몸을 낮추었 다.

 

"그러면 부탁한다, 코타로 군."

 

대답은 필요없었다. 사유네가 시로의 배를 박찼다. 그들은 달 리기 시작했다. 사슴을 쫓다 보니 생각보다도 숲 속 깊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달리고 달려도 숲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화살을 피해 이 리저리 방향을 바꾸다 보니, 제대로 길을 들었는지도 확실치가 않았다. 코타로는 숨을 몰아쉬면서 주위를 살폈다. 한동안 끊임 없이 날아들던 화살은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습격 자들에게서 벗어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챙 하고 병장기가 뽑혀 나오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코타 로는 곧장 말에서 뛰어내렸다. 어느새 그들의 후방에서 칼을 뽑 아든 십여 명의 사람들이 그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감히 대유국의 황제를 노리는 네놈들은 누구냐."

 

코타로가 사유네의 앞을 막아서며 으르렁거렸다.

 

"굳이 말해 줄 필요가 있느냐? 황제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 을 텐데,"

 

검을 든 이들 중에서도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말했다.

 

"운이 나쁘군. 황제와 함께가 아니었다면 괜히 목숨을 잃을 필 요도 없었을 테지만, 이렇게 된 이상 너 또한 여기서 살아 나가 지 못한다."

"글쎄."

 

코타로는 떨리는 숨을 한 번 가라앉히고 검을 단단히 쥐었다.

 

"살아서 나가지 못하는 쪽은 네놈들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말이 쉽게도 나오는군."

"만용을 부리는 자는 죽을 자리를 찾아드는 법이지. 쳐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날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두엇은 걷 어낼 수 있었으나 절대적으로 수가 불리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상처을 입을 각오를 하고 코타로가 검을 휘두르는 찰나, 챙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그의 팔을 노리던 검이 멀리 튕겨나갔다.

 

"코타로 군, 싸워라! 여기서 밀리면 우리 둘 모두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터이니!"

 

시라카베 사유네가 말을 몰아, 그 힘을 담은 채 상대의 검을 쳐 낸 것이다. 그러고도 곧장 사유네는 검을 휘둘러 또 다른 자의 공 격에 맞서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있으니 주변을 달리며 속도와 힘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응, 하고 코타로는 커다랗게 답하고는 눈앞의 적들을 베어 나갔다. 전력은 저 쪽이 이 쪽의 다섯 배는 된다. 그러나 저들은 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잘 활용하면 빠 져나갈 수도 있다. 또 한 번의 검을 강하게 부딪치면서 코타로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지금은 막다른 길을 두고 포위당한 상황. 무력화시킨 이가 둘이고, 아직까지 검을 들고 있는 자들이 많다. 모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유네, 포위망을!"

 

코타로가 외치자 사유네 또한 알았다는 듯 한 쪽의 무리들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너무 떨어지지 말거라!"

 

포위망을 뚫은 순간 코타로가 사유네의 말을 도로 잡아타고 빠르게 달려나간다는 생각일 터였다. 코타로는 비스듬히 들어 오는 검을 받아내고 상대의 가슴을 노렸다. 기어코 한 사람이 피 를 뿜고 쓰러졌지만 코타로 또한 옆구리에 상처를 입었다. 코타 로는 검을 휘두르며 한 발 한 발 사유네에게로 다가갔다. 쓰러 진 이는 이제 넷…….

 

"코타로 군, 지금!"

"알겠네!"

 

답하는 소리를 기합 삼아 코타로는 다시금 묘기 같은 동작으 로, 이미 달려나가기 시작한 시로에 올라탔다. 그 순간, 머리가 뒤로 휙 당기는 느낌에 코타로는 놀라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 나 어딘가에 걸린 듯 고개는 반 정도밖에 돌아가지 않았고, 희미 한 주변시에는 그들에게로 달려드는 칼날들이 셋이나 보였다. 일촉즉발의 순간은 주마등처럼 느리게 지나간다고 하던가. 식 은땀이 등 뒤로 흐르는 것을 선명히 느끼면서 코타로는 자신의 등 뒤로 칼을 휘둘렀다. 서걱 하고 머리카락이 베여 나가면서 시 로가 세차게 땅을 박차고 나갔다. 숲 속에서 전력으로 말을 달리며, 사유네는 앞을 막아서는 나 뭇가지들을 쳐냈고 코타로는 뒤를 살피며 쫓아오는 이들이 없 는지 고했다. 얼마쯤 달려 더 이상 추적이 보이지 않게 된 시점, 코타로가 말을 꺼냈다.

 

"사유네, 몸은……."

"대단치 않은 상처다. 놈들이 시로를 노렸어. 말을 먼저 쓰러 뜨리면 땅에 발을 딛은 둘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 이었겠지."

"시로가……."

"다행히 시로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력으로 오래 달릴 수는 없을 터."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유네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시로 또 한 주인의 위기를 직감했는지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그들 뒤로 점점이 핏방울이 날리고 있었다.

 

"그 자들을 잡아 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돌아가서 이야기하지."

 

사유네는 짧게 답하고는 다시 도주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 나 달렸을까, 드디어 숲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나 무 사이를 빠져나오면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고, 너른 평원 저 멀 리 말을 탄 사람 그림자들이 보였다. 아마 처음 이야기했던 미 시는 훨씬 지나 있는 것 같았다. 인영 몇 개가 이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확인한 코타로가 커다랗 게 외쳤다.

 

"폐하께서 돌아오셨다! 황제 폐하를 수행하라!"

 

군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뒤를 한 번 더 돌아보고, 아무것 도 쫓아오지 않는 숲을 확인한 코타로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서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달리기 시작하고서 처음으로 뒤를 돌 아본 사유네가 눈을 크게 떴다.

 

"코타로 군. 머리카락이 잘렸구나."

 

***

 

어깨에 붕대를 감은 사유네와, 그보다 더 많은 곳에 상처를 입 어 곳곳을 감싼 코타로가 침전에서 마주보았다. 코타로는 잘려 나가 간신히 묶이는 머리카락을 잘 빗어 정돈한 채였다.

 

"폐하, 어찌된 일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대체 어찌 황실의 사 냥 대회에 그런 무리가 숨어들어 있었는지……."

 

사유네는 침상에 몸을 기댄 채 나른히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 다.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의 얼굴을 알아보았어. 건국 초기에 숙청했던 세력의 잔당들 중 하나란다. 그렇잖아도 그들의 본거지는 알아 둔 참이야. 회유할까 아니면 엄정히 다스릴까 고민하고 있었는 데, 이렇게 되었으니 다른 수는 없게 되었구나."

 

모두가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 뜻이었다. 코타 로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는 내가 그대에게 물을 것이 있어, 코타로 군."

"하문하소서."

 

사유네는 흘러내리는 백발을 두고 가만히 턱을 괸 채 그를 바 라보았다.

 

"그대는 그들과 호응해 나를 죽일 수 있었지. 어째서 그러지 않았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저는 폐하의 후궁입니다."

"나는 그대의 나라를 빼앗고 가족과 친척들을 죽게 한 원수 지. 그렇지 않니?"

"그것은, ……."

 

코타로는 고개를 떨구고 고민했다. 사유네는 어째서 그가 자 신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묻지만, 그는 그런 생각은 한 적조차 없 었다. 처음 습격을 받았을 때부터 사유네를 구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왜 그런가? 확실히 사유네의 말대로 그는 자신의 원수이기도 했다.

 

"그것은, 폐하께서 이 나라에 필요하신 분이시라고 느꼈기 때 문입니다."

"내가?"

"예. 국사를 돌보시는 폐하를 곁에서 보필하며 느꼈습니다. 이 땅 구석구석, 어디에도 폐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가능한 한 고통받거나 어려운 사람이 없도록 공정한 정치를 하 려고 노력하시지요. 밤낮없이……. 그것이 저의 눈에도 보였습 니다. 오랫동안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나라를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이시라고, ……."

"그것이 원수의 나라인데도."

"이제 세상에 남은 단 하나의 대국(大國)이기도 하지 않습니 까. 비록 옛 일을 떠올리면 여전히 입이 쓰고 속이 타는 고통이 느껴집니다만……."

 

코타로는 천천히 입 끝에 웃음을 띄웠다. 가벼운 미소였지만, 그 표정을 짓기까지 담긴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니, 세 상에서 가장 무거운 표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폐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이, 제가 살아가려면 마셔야만 하는 쓴 독임을, 압니다."

 

사유네는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본다.

 

"폐하께서 그것을 알려주셨지요."

"나는……."

 

사유네의 손이 그에게로 다가와 짧아진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말하면서도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어. 세상이 무정하다, 쓴 것 을 삼키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코타로 군이 입은 상처와 품게 된 분노는 너무나 클 테니까. 무정함을 말하면서도, 과연 코타로 군이 정말 그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

 

그리고 사유네는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지. 제국 이 만들어지면서 흘린 모든 피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해서야 황 제의 자리에 설 수 없으니."

"이해합니다."

 

코타로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리고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그 말에 담긴 진심을 사유네는 알 수 있었다.

 

"나를 미워하지 않는구나."

"폐하께서 제게 필요하신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내가?"

"예. 살아가기 위한 쓴 독을 먹었으니, 이제 저에게 있어서도 폐하의 나라가 저의 나라이지요. 그렇다면 폐하께서 이 나라에 필요하신 만큼, 저에게도 폐하는 필요하신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유네는 피식 웃었다.

 

"말이 늘었네. 처음에는 그토록 말이 없던 코타로 군이."

"폐하의 덕분입니다. 저, 폐하. 그런데, ……."

“무엇이니?”

“말씀을, 이전과 다르게 하십니다.”

“그대도 숲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니?”

“그건 상황이 급하다 보니 엉겁결에…….”

“괜찮다 싶었거든. 그러니 코타로 군도 나에게 계속 그 때처 럼 말해 주지 않겠니?”

“그건.”

 

코타로는 고민하다가 묻는다.

 

“명령이십니까?”

“아니.”

 

사유네는 고개를 저었다.

 

“부탁이란다.”

“…….”

 

코타로는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듯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유네.”

 

그리고 눈 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잔잔한 미소가 그들 모두 의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 밖에서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려, 문득 창을 바라보면 봄눈이 내리고 있었다. 송이송이가 뭉쳐서 내리는 포근하고 따뜻한 눈이었다. 가만히 눈 내리는 바깥을 보 던 코타로가 말했다.

 

"사유네."

 

사유네는 처음 그대로 코타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코타로는 사유네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듯 제 어깨로 눈을 주 었다가,

 

"처음에 마음에 든다고 하던 머리카락은 지금 없지만, ……."

 

이제 와서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사유네는 말하려고 했 다. 하지만 코타로가 조금 더 빨랐다.

 

"이런 모습이라도 괜찮다면 밤에 나를 찾아와 주게."

 

사유네의 눈이 크게 뜨인다. 그리고 설경(雪景)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그 얼굴이, 얼굴 전체가, 온화한 빛을 띠었다. 입끝이 올라가고,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래. 비록 코타로 군의 몸이 다 낫기 전에는 어렵겠지만……."

 

빙긋이 웃음을 머금은 사유네의 얼굴은 시린 빛의 색깔들을 가졌음에도 따뜻함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 온기가 코타로에게 도 전해지고, 사유네는 코타로의 손을 잡는다. 사철 눈이 내리 는 나라. 봄의 추위에도 상관없이 따스함은 그 사이에서 피어나 고 또 피어났다.

 

"그렇게 하자꾸나."

 

사유네는 속삭인다. 마치 지금 바깥에서 내리는 따뜻한 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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